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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 - 대전창작센터

빈집을 채우고 살고 싶은 마음

 

 사람의 온기가 떠나버린 빈집,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건물,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오래된 창고…. 여전히 도시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흉물이 되어버린 곳들이다. 이런 공간들이 생명력을 얻고 다시 쓸모 있는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인 대전창작센터를 둘러보며 그 답을 얻었다. 시작은 ‘관심’이었다. 

      

“현재까지 도심 속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로서 대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잖아요. 이 공간을 정말 예쁘게 잘 꾸며서 대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재미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8년 정식으로 개관한 대전창작센터는 국내 최초로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만들어진 복합문화센터다. 이곳은 1958년 농산물 검사소 대전지소가 자리했던 관공서 건물로 1999년 ‘대전시 좋은 건축물 40선’에 선정됐고, 2004년 9월에는 등록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한국 근대건축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지역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1999년 (구)국립 농산물 품질관리원 충청지원이 이사를 간 후, 줄곧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던 빈 공간이기도 했다. 건물 주변은 언제나 한산했다. 지하상가 입구가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인적이 드물어 스산한 기운마저 느껴졌던 곳. 어쩌면 그렇게 오랫동안 도시의 흉물로 남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건물이 조금씩 사람의 온기를 머금기 시작한 것은 바로 2005년부터다.

 

이러한 변화는 대전시립미술관 김민기 학예연구사의 작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대전시립미술관은 병원 로비, 도서관, 지하상가, 대흥동 골목 등의 미술관 밖 공간을 활용한 <열린미술관> 전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전시 프로그램 기획에 몰두하고 있었던 김민기 학예연구사는 도심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대전창작센터 건물을 눈여겨보았고, 관리부처인 보훈청에 <열린미술관> 전시를 제안했다. 그 후 2년에 걸쳐 2회의 기획전시를 진행했고,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대전창작센터 개관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건물이 지어진 1958년 당시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작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현대의 미술전시 시스템을 어떻게 잘 연결해놓느냐가 관건이었는데, 문화재청 위원들에게 자문과 심의를 받아서 모든 작업을 진행했고 건물 외벽 색깔은 물론 구조 하나하나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과거는 복원하되 미래를 본다
대전시립미술관의 <열린미술관> 전시가 진행되면서 대전창작센터 건물의 관리부처가 보훈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됐다. 그리고 대전시는 문화재청과의 계약을 통해 대전시립미술관이 현재 대전창작센터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영구 활용할 수 있도록 일을 진행했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리모델링 당시 건물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낡은 지붕 기와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어와 건물 내부 곳곳의 시멘트가 떨어져나갔고, 외벽의 페인트칠도 벗겨진 부분이 많았다. 또한 건물 뒤편에는 설계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창고가 증축되어 있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었다. 먼저 빗물이 새는 지붕 보수를 위해 1958년에 만들어진 기와를 찾아 나섰다.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똑같은 기와를 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이 따랐다. 수소문 끝에 경상남도에서 건축 당시 쓰였던 기와를 찾아낸 것이다. 외벽의 페인트 역시 처음 색을 그대로 연출했다. 또한 1층에는 보존돼 있지만 2층에는 그 흔적만 남아있던 창문 설비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건물 내부의 천장, 계단 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부 전시장은 되도록 못질을 하지 않고 벽을 세워 만들었다. 대전창작센터가 아닌 근대건축 문화재로서의 가치 또한 함께 보존해나가기 위해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잃어버렸던 건물의 시간과 역사를 되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으로서 대전창작센터는 대전의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것, 신기한 것,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설치, 마술, 착시, 미디어를 활용한 기획 전시를 통해 사람들이 미술에 재미를 느끼고, 그런 미술이 사람들의 일상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유도했죠.”

2층 전시장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스크린이 덩그러니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호기심에 한 발짝 걸음을 옮기던 순간,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김민기 학예연구사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에 의해 움직이는 영상이다.

 

2013년 11월 17일까지 진행되는 <프로젝트리뷰 2013-공존> 전시 작품 중 하나로 미디어 아티스트 5명과 소설가 1명, 그리고 과학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 작업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티스트들의 예술적 감각과 반짝이는 아이디어, 첨단과학의 섬세함과 놀라움도 만날 수 있다. 실험적이지만 결코 어렵지 않은 작품들로 눈길을 끄는 전시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국유재산이기 때문에 대관 전시를 할 수 없는 대전창작센터에서는 일 년에 4회 정도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실험적이고 대중적인 요소들을 전시의 주요 테마로 삼는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에 활력을 주고 즐거움이 되는 전시를 통해, 거리 미술관의 높은 문턱을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게 낮추는 것이 목적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주변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주말이면 외지에서 찾아오는 관람객들도 점점 그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흔히 대전의 문화예술을 논할 때, 지역출신 작가들의 활동이 많지 않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활동하는 작가들의 수가 많지 않고, 문화예술 활동의 규모는 작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지역에 흡수되지 않고 대전만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대전창작센터는 개관 초기 ‘아티스트 스터디’라는 그룹을 운영했다. 젊은 작가들이 모여 서로의 작품에 대해 논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함께 공유하는 모임으로 100명에 가까운 젊은 작가들이 이 스터디에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대전창작센터는 ‘대전예술 114’라는 별칭을 얻었다. 안으로는 젊은 지역작가들의 소통 공간, 밖으로는 대전지역 작가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네트워크의 중심이 된 것이다.

대전은 한 때 문화예술의 불모지라 불리기도 했다. 젊은 작가들이 활동하기에는 너무나 좁은 동네였고,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해줄 만한 인적, 물적 기반도 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원도심 활성화를 시작으로 도시문화를 새롭게 만들고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동안 음지에서만 활동해왔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서서히 따뜻한 햇볕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 어떤 지역보다 뚜렷한 색을 지닌 문화예술도시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 대전. 그 출발선에서 대전창작센터는 대전 문화예술을 이끌어갈 구심점이 되기 위해 오늘도 한발 한발 조심스런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원도심은 창작센터 기억의 원형이다 / 창작센터의 주요 전시활동

대전창작센터가 대흥동과 원도심을 주제로 기획한 전시의 면면을 보면 대전창작센터가 지향하는 지점을 엿볼 수 있다.지리적으로도 원도심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전미술의 흐름을 놓치지 않겠다는 작은 의지의 표현이자 실천이다.

2010년 8월에 열린 <열린미술관 – 대전블스>전시가 그 시작이었다. 이 전시는 그동안 대흥동에 대해 재조명하지 못했던 시간, 장소성에 주목하고 대전미술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전시로 다양한 실험미술과 옛날 대흥동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신문스크랩, 전시오픈기념으로 촬영한 옛날사진을 등을 선보였다다. 뿐만아니라 대흥동의 오랜 시간과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작가와 화랑대표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옛날 대흥동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영상,  대전여상 학생들이 대흥동의 현재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들을 수집, 전시하여 대흥동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전시로 평가받았다.

 


대흥동예술가들1950~60년대  /2011-03-04 ~ 2011-04-17.
1950~60년대 대흥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 및 예술관련 자료들을 살펴봄으로써 지역미술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 미술자료의 가치 및 그것을 수집하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미술관 아카이브 구축 사업의 중요성을 제기하고자 개최한 전시였다. 또한 대전미술의 초석이었던 주요 작가의 작품 및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소장자를 찾아 자료의 기증 및 자료대여 등의 협조를 기대하는 것도 전시의 목적으로 삼았다.

대전미술아카이브 2012:1950~60년대 고교미술활동 부대행사/2012.05.25 ~ 2012.08.19
 이 전시는 대전미술의 생성과 발전, 그 흐름을 살펴보는 전시로 <대전미술 아카이브 2011:대흥동화가들>전과 연속성을 갖는 전시이다. 대전지역에 미술활동 기록이 나타난 것은 이동훈, 박성섭, 김기숙이 미술교사로 활동한 1940년대로, 그 이후 1970년대 대전에 미술대학이 설립되기까지 외부에서 미술교사로 유입된 미술인과 그들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은 중등학교 학생들의 움직임이 미술활동의 대부분이었다는 것에 전시의 초점을 맞추었다.
6. 25전쟁 이후 대전에는 재건의 움직임과 함께 초등학교가 급격히 늘어나고 중등학교는 중학교, 고등학교로 분리되며 미술교육이 미흡하나마 활발해지는 시기였다. 대전의 여건은 여전히 타 도시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지만 계속되는 중, 고등학교의 설립으로 미술교사의 유입이 늘어나게 되고, 이들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미술반 활동을 시작으로 미술활동인구의 저변을 넓혀 가게 된다. 대전에 미술대학이 설립된 것은 1970년 대전실업초급대학에서 생활미술과의 설립과 1973년 목원대학교와 숭전대학교에 미술학과 설립되기 전까지는 고교미술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대전미술에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활동은 단지 고교서클 활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현재 우리나라 화단에 중진작가들이 되었다는 것은 대전미술사를 기술할 때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대전에 최초의 연합서클은 1958년에 결성하여 전시를 개최했던 ‘루-불 미술동인’이다.
 이 전시는 그들의 활동 당시 제작되었던 작품 혹은 근접년도의 작품을 전시하여 1950~60년대의 작품양상을 살펴보고, 기록물들(리플렛, 사진, 서신, 카드 등)을 함께 전시해 그 시대의 여건과 활동들을 전하고자 했다.

 

 

프로젝트대전.2012 원도심 프로젝트 / 2012-09-19 ~ 2012-11-18
<원도심 프로젝트>는 다양한 조형예술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17인을 초대하여 대전 원도심 대흥동 일대에서 '지역재생' 프로젝트를 확장된 커뮤니티아트로서 실현하고자 했다.
'예술'은 '도시'를 재생하는 에너지로 사용되어 (원)주민의 사적인 삶과 공적(경제적)인 삶의 현장에 직접 투입된다. 이에 17인의 예술가들은 주민들의 현장에서 작업하며 그들의 참여를 유도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도시민의 시선과 초상 그리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위트와 심도 있게 그려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프로젝트는 각 장소에서 과거의 역사성과 현재의 장소성을 담아내고 나아가 미래의 경제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향후 다양한 문화프로젝트를 포함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발전시켜 대전의 생성과정과 도시개발에 따른 딜레마를 밝혀내는 기회로써 대전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대전미술의 새물결 대전미술아카이브 2013  / 2013-05-24 ~ 2013-08-25
대전미술은 도시형성기인 1920년대 학교가 세워지고 미술교사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1940년 이전까지는 뚜렷한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40년대 이후 도시가 발전하고 학교의 수도 늘어남에 따라 미술인구도 늘어나고, 개별적인 작품활동과 그룹전 등이 열리면서 미술문화가 활기를 띄게 된다. 그러나 중등학교를 미술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술기반은 자립성을 갖추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후 50년대와 60년대에 들어와서 미술활동은 눈에 띠게 증가하지만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선 여전이 외지(미술대학에 입학하기 위해)로 나가고 신인등용을 위한 변변한 미술대전도 개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미술전문 교육기관이 신설되고 국전성격과 같은 미술계의 신인 등용문인 ‘충청남도 미술대전’이 개최되면서 대전현대미술은 경쟁력과 자생력을 갖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 대전지역은 목원대와 숭전대(현 한남대)에 미술학과 신설이 되고 1971년에는 충남미술대전이 개최되면서 대전지역은 미술전문인을 배출하고 미술에 등용할 수 기회가 넓혀지게 된다. 이에 따라 미술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작품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화랑들이 잇따라 개관되고 미술 활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며 자생력을 확보한다.
이러한 점에서 대전현대미술의 자생력과 발전을 이룬 기점을 1970년대 초반으로 규정하고, 그 역할과 파생적 영향에 대한 고찰을 위하여 전시를 기획했다.

 

대전창작센터가 대흥동과 원도심활성화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리적으로 대흥동에 자리하고 있다는 특징도 있지만 창작센터가 바라보는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전미술의 흐름을 조명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는 가운데, 대전미술의 산실인 대흥동을 주목하고 더 나아가 잊혀지고 있는 원도심의 기억을 복원함으로써 대전미술과 원도심 문화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창작센터가 창작의 흔적을 찾아내는 동안 우리의 기억도 퍼즐처럼 맞춰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