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숨쉬는 4.16 2014.08.16 05:30

<숨쉬는 4.16> 길 위에서, 두 성자를 만나다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기획시리즈 <숨쉬는 4.16> 2회 (2014년 8월)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이 세월호 대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기획시리즈 <숨쉬는 4.16>을 마련한다. 저마다 기억하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작가협동조합이라는 조직의 성격에 걸맞게 글쓰기를 통해 잊지 않으려 한다. 이 기획시리즈는 2017416, 3년 상이 끝날 때까지 이어갈 예정이다. 한 달에 한 번, 매달 16일마다 다양한 형태의 글과 여러 장르의 콘텐츠를 게재할 것이다. 물론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하려고 한다.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세월호 대참사는 대한민국의 참혹한 문신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세월호는 지워지지 않는 삶의 일부다.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이 연재를 기획한 이유다.

 

8월에는 두 명의 글을 싣는다. 스토리밥 조합원인 함순례 시인의 시와 산문, 그리고 관심을 갖고 참여한 조연미 님의 글이다.

 

아래의 글은 < 숨쉬는 4.16> 프로젝트에 참여한 조연미 님의 글이다. 그녀가 자기 소개를 이렇게 보내왔다. "타이핑으로 밥 벌어먹는 엄마. 대전 MBC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했으며 2013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단편소설 <그들이 존재하는 1905>를 출간했다. 현재 스토리텔러 작가로 방송 출판 기획분야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숨쉬는 4.16>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원고와 사진을 보내준 조연미 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기획시리즈는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길 위에서, 두 성자를 만나다

 

 

 

 

“만 킬로의 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구백 킬로 걸었습니다. 나머지 구천 킬로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 승현이를 위해서요.”

-단원고 故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

 

무려 38일 동안 안산 단원고에서 진도 팽목항으로, 다시 대전 월드컵 경기장까지 2천리 길을 걸어온 단원고 故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를 만나러 갔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가 만나러 왔다는 게 맞겠습니다. 발에 물집이 나고, 피가 터지고, 체력은 바닥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걸었습니다. 진도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대전으로. 꼭 만나야 했습니다. 8월 15일, 대전에 오는 교황 프란치스코를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눈물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직 많이 울어주셔야 합니다. 우리 웅기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의 죽음에 아직까지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바다 속에서 왜 죽어야 하는 지도 모르고 숨을 거둔 우리 아이들의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더 울어주셔야 합니다.”

-단원고 故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

 

2014년 8월 14일, 대전시 서구 진잠 다목적 체육관에서 유성구 월드컵 경기장 까지. 저는 단원고 故 김웅기 군의 아버지인 김학일 씨를 만났습니다. 무려 3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함께 걸었습니다. 그는 저를 알지 못했고.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묵묵히 그들의 뒤를 걸었습니다. 그렇게라도 그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들의 뒤를 따르고 싶었습니다. 세월호 사고로 아들을 잃은 두 아비의 뒷모습을요.

 

 

 

세월호 사고로 아들을 잃은 이호진씨와 김학일씨. 안산 단원고에서 진도 팽목항을 거쳐 대전 월드컵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900km의 대장정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다면 내가 먼저 져야겠다는 생각에서 십자가를 지고 걷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라도 십자가를 짊어져야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 같다고요.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렇게 저를 두 번 울렸습니다. 생떼 같은 내 새끼를 잃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 남은 실종자를 위해 다시 팽목항으로 향했을 때 한 번. 잘못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먼저 십자가를 졌을 때 또 한 번……. 그들은 우리안의 예수요, 성자였습니다. 예수는 믿지도, 믿어지지도 않는 저였지만 눈앞에 나타난 예수 앞에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처럼. 자식 잃은 두 애비의 뒤를 따라야 했습니다.

 

 

 

 

 

아침 6시 집결.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주황색 우의를 입고 걸어가는 친구가 이호진씨의 딸, 故 승현군의 누나 아름씨입니다. 붙잡고 사진 찍자는 건 예의가 아닌듯해 이번엔 그냥 조용히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2014년 8월 14일 아침6시. 아이들이 떠난 지 121일이 되던 날. 추적추적 비가 왔습니다. 그.리.고. 두 아버지와 딸의 마지막 걸음이 시작됐습니다. 문규현 신부님을 비롯해 대전지역 각 성당의 신부님과 수녀님이 먼저 그들을 따랐고, 200여명의 시민이 뒤를 이었습니다. 대전에 30여 년 간 살면서도, 저는 새벽 대전의 길을 이렇게 많은 이들과 걸었던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보도 자료나 SNS를 통해 유가족들의 모습을 보았을 땐, 한 없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는데 오히려 그 길에서 만난 유가족의 모습은 당당하고 힘차보였습니다. 저 또한 무언가에 이끌리듯 노란 우산을 쓰고, 함께 온 이들과 발걸음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앞을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던 엄마와 아이. 이들의 뒷모습에서 행복과 희망을 느꼈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책, [도가니]에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세상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이러는 것이다」라고요. 그래서 나왔어요.”

-세월호 도보 시민 행진단 이 영씨-

 

우연히 옆에 걷게 된 40대 중반의 여성 시민에게 물었습니다. 이 길을 왜 걷게 됐냐구요. 더러운 세상을 바꾸고 싶거나, 한 달이 다 되 가도록 유가족이 단식을 해도 쳐다보지도 않는 정부를 욕하거나,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특별법에 야합해준 정치인을 비판하거나. 지금의 정세에 따른 강한 분노와 화, 혹은 그 만큼의 절망 섞인 대답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우문현답이었습니다. 그녀는 원래 세상은 그랬다고. 그런 세상에 같이 더러워지고 싶지 않아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녀의 말에, 저는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원래 세상은 그랬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한 횟집에서 정치인이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했었더랬죠.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도 가진 자들은 폭탄주를 마시며 ‘지금 이대로~’를 외쳤고, 용산 철거민들을 강제 진압하다 죽이고는 진상은커녕 그들을 구속시켰고, 자신들의 경영 잘못으로 어려워진 회사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물며 2000여명을 해고하고, 이에 항의하는 쌍용차 노조원들에게 용역깡패를 불러 폭력을 행사하고, 구속 수감한 것도 모자라, 몇십억의 배상 폭탄을 물었습니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어르신들을 차가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몰아냈던 세상입니다. 돈으로 안 통하면 폭력으로, 폭력으로 안통하면 돈으로 겁박하는 세상. 아, 이 모습, 많이 보지 않았나요? 조폭 영화에 나오는 3류 저질 양아치들의 행동, 요즘 말로 싱크로율 100센틉니다. 저는 그런 세상에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샌가 분노는 생활 전선에서 희미해졌습니다. 돈을 벌어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남보다’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싶고, 남보다 잘 살고 싶던 몹쓸 욕망들이 우선이 됐습니다. 호위호식 하려 세상에 무관심했던 내게도 세월호 침몰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를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한 선원이 떠올라 창피했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속내를 꺼내고 나니 오히려 속이 시원해집니다. 이내, 순례단도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청합니다.

 

 

 

                                     < 오른쪽에서 두번째 노란 우산 짚고 있는 이가 필자 조연미씨 입니다>

 

순례단에서 만난 처음 사람들. 일단 앞치마부터 받아 목에 걸었습니다. 통성명보다 대화를 먼저 했는데,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편했습니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제 삶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다시 출발! 끝이 보입니다. 월드컵 경기장이 머지않아 보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에서 두 아버지는 무얼 떠올릴까요? 어떤 감정들이 솟구칠 까요? 900킬로미터에서 단 1%도 안 되는 길이를 걸은 제가 짐작할 수 없는 생각의 범윕니다. 무수한 생각들을 뒤로 하고, 일단 그냥 걸어보기로 합니다. 6킬로 미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웅기 아빠를, 화장실에서 몰래 피 묻은 양말을 벗으며눈물을 흘렸다는 수현 아빠의 뒤를. 말없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드디어, 월드컵 경기장. 교황님을 반기는 현수막이 끝없이 펼쳐진 월드컵 경기장 입구에서, 웅기와 수현이의 두 아버님이 뜨거운 포옹을 나눴습니다. 수현이의 누나 아름씨도 모두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뜨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시민들은 이들의 완주에 박수 대신 눈물로 격려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두 아버님의 한 마디가 이어졌습니다.

 

 

 

 

“이제 겨우 900km 밖에 걷지 않았는데,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더는 걷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아무도 지지 않는 십자가를 대신 지고 900km를 걸을 때도 돌아서지 않는 세상이 너무나 야속했습니다. (중략) 담쟁이넝쿨이 높은 담을 한 뼘 한 뼘 올라가듯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도보 순례 기간 함께 해준 시민 여러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아들 웅기를 만나면 여러분들이 함께 했던 것을, 감사한 말을 꼭 하겠습니다.”

 

이렇게 두 아버지의 2천리 길은 끝을 맺었습니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건너며, 그 끝에서 우리 아이들을 살아서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 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부모든 천리만리라도, 지구 끝까지라도 걸을 겁니다. 이 마지막이 더욱 빛나려면, 이 길의 마지막에서 제대로 된 특별법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가족들은 대학특례도,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로지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진상규명 ‘특별법’ 뿐입니다.

 

언제부터 아이들이 단체로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나게 된 건지, 혹시 누가 그렇게 유도 한 것인지, 수령 20년이 다 되가는 늙은 배를 들여오도록 허가한 건 누군지, 무리한 증개축과 부실한 안전장치에도 이상이 없다고 도장을 찍어준 사람은 누군지, 왜 그랬는지. 왜 세월호 직원의 노트북에 사사건건 국정원의 보고서가 있는 것인지, 그 시간 대통령은 어떤 지시를 했는지. 왜!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난 꿈이 있다고, 무섭다고, 외쳤을 때. 아무도 구하지 못한 것인지요.

 

지금껏 ‘왜!’라는 물음에 돌아온 건, 유병언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선장의 팬티 탈출 뿐 입니다. 제대로 된 특별법 제정으로,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두 아버지의 순례의 마지막도, 그를 향한 것 이었습니다.

웅기 아버지는 아이를 건져 올린 후, 한 번도 아들 이름을 두 번 이상 불러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순례의 마지막,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 주재의 미사가 끝나면 아들 이름을 두 번 이상 불러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8월 15일.

두 아버지는 드디어 교황을 만났답니다. 웅기 아버님은 순례를 끝내고 마지막 발언을 통해 ‘아들이 교황을 만나려고, 이런 선물을 주려고 죽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교황과의 만남이 웅기의 선물 같다구요. 하지만, 웅기 아버님은 그 만나기 어렵다는 교황보다, 살아있는 아들, 웅기를 만나고 싶을 겁니다.

 

내일은 광화문에서 단식하고 있는 유민 아빠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노란 종이배도 접어보고, 노란 리본도 동네 곳곳에 묶어야 겠습니다. 아차, 지인들에게 서명 받는 일도 해야겠습니다.

 

故이승현군과 故김웅기군 아버지의 마지막 순례길에 서서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에필로그>

 

순례가 끝 난 후 유성성당에서는 두 아버지의 완주를 기념하는 작은 음악회 ‘길 위에서’가 열렸습니다. 故 이승현 군 아버지 이호진씨의 능숙한(?) 진행으로 여러 공연이 펼쳐졌는데요. 故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의 한 마디가 가슴에 남습니다.

 

“아들을 건져 올린 후 지금까지, 웅기 이름을 두 번 이상 불러본 적이 없어요. 내일 미사가 끝나면 우리 아들 웅기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요.”

 

이호진씨가 아들이 가장 사랑스러웠던 순간을 물었습니다. 김학일씨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웃으면서도 문득문득 울음이 터지고, 가슴이 미어지는 삶이 이어지겠지요. 우리가 함께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웅기가 4월 16일 9시 28분, 마지막으로 휴대폰에 남긴 말은 “사랑합니다.” 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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