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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숨쉬는 4.16

<숨쉬는4.16> 물에서 별이 된 화가, 빈하용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기획시리즈 <숨쉬는 4.16> 2014년 11월 -제 5회-

 

물고기를 좋아하던 화가, 물에서 별이 되다.

- 단원고 2학년 4반 18번 빈하용 전시회를 다녀와서

 

  세월호 대참사가 발생한 지 7개월이 됐다.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이 기획 연재하고 있는 <숨쉬는 4.16>, 11월에는 그림을 좋아하던 고 빈하용 군의 전시회 소식을 다뤘다. 

난 7월부터 시작한 이 기획은 매달 16일마다 글을 올리고 있다. 2017년 4월까지 3년상을 치르는 마음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밝힌다. 망각은 죄악이라는 마음으로 기획을 이어간다.

 

이 기획은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소속 작가들의 참여뿐만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11월에는 방송 글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글을 쓰는 조연미 작가가 참여했다. 조연미 작가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세월호 대참사를 비롯해 우리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물고기를 좋아하던 화가

 

물고기를 좋아하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캔버스가 아니어도 노트에, 학교 가정 통신문에, 하얀 종이쪽지 만 있으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 속 물고기는 유유히 도화지를 헤엄쳐 가기도 하고, 도심을 뚫고 세상을 향해 나오기도 했고, 꿈을 향해 거칠게 포효하기도 했습니다. 평화와 자유와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물고기. 화가에게 물고기는 또 다른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안타깝게도 거꾸로 뒤집힌 배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향년 17세. 단원고 2학년 4반 18번, 故 빈하용 작가의 이야깁니다.

 



 

유독 매서운 추위가 내려앉은 날이었습니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10일째 실종자 수색 작업을 종료하겠다고 발표했고, 세월호 이준석 선장은 유기치사‧상, 선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6년 형이 선고된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304명의 세월호 승객을 ‘아무도 구조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선 어떤 것도 밝혀지지 않았고, 누구도 처벌받지 못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보다, 상처 깊숙한 곳을 억지로 도려내려는 위정자들의 계략에 많은 이들이 아파했습니다. 그 날, 저는 빈하용 작가를 만났습니다.

 

 



단원고 2학년 4반 18번 이었던 빈하용 작가의 전시회가 열리는 서촌 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 60㎡ 남짓한 전시장에 그림 액자 17점과, 습작품, 작가의 책상이 놓여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는 복도에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맨 처음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크기가 매우 작아 전시를 해 놓을 수 없는 빈하용 작가의 작품을 스티커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던, 천재 소년 빈하용

 

빈하용 작가는 여섯 살 때부터 그림에 빠져, 오로지 그림 하나 만을 인생에 바쳐왔다고 합니다. 큰 덩치에 말수가 별로 없던 빈하용 작가. 백 마디 전하고 싶은 말과 천 가지 이루고 싶은 꿈을 그림에 표현하며, 그림으로만 소통했습니다. 전시회장을 꿋꿋히 지키는 작가의 자화상들. 굳게 다문 입술과 유독 강한 눈빛에선 작가의 그림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의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빈하용 작가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였습니다. 워낙 그림을 좋아해선지 종이만 보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학교에서 보낸 가정 통신문, 성적표까지……. 그에게 빈 종이는 뭐든 캔버스요, 상상의 공간이었습니다. 마치 담뱃값 종이와 껌 종이에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섬세한 필치, 기발한 상상력, 대담한 색채를 지닌 빈하용 작가의 그림! 결코 10대 소년이 그렸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미술학원도 세월호 사고 이전 단 6개월을 다녔을 뿐이라고 하는데요. 가히 천재적인 빈하용 작가의 작품은 각계 미술 전문가들에게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빈하용 작가의 부모님은 하용의 개인사에 관해서 어떠한 인터뷰도, 공개도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빈하용 작가는 생전에도 말없이 작품으로만 소통했던 소년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뜻을 따라 작품을 통해 ‘작가 빈하용’에 주목해주길 원했고, 전시회 또한 특별한 홍보 없이 조용히 치러지는 중입니다. 다만, 놀라운 표현력과 독특함에 입소문을 타고 관람객이 꾸준히 늘고 있답니다.

 

크레파스며 볼펜, 0.2mm 펜, 사인펜, 물감. 도구를 가리지 않고 표현하며 도구만의 질감을 살려 연구하고 실험했던 빈하용 작가. 암울하면서도, 자유로우며, 따뜻함을 지향하는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소년의 자유로움과 중년의 원숙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최근 흥행하는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부상하는 우주인을 표현하기도 했고,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을 그만의 구상으로 그렸는가 하면, 하늘을 나는 물고기, 다양한 일러스트 작품들까지. 한 소년의 꿈과 희망이 천재적 감각을 만나 걸작으로 탄생했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그의 새 작품을 볼 수 없다는 것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천재 화가를 잃었다는 것에 깊은 슬픔과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그림이 내게 물었다

 

주인을 잃은 텅 빈 의자와 붓, 화첩, 앞치마와 이름표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바싹 마른 파레트가 200여일이 넘는 시간 주인을 기다렸을 겁니다. 덩치 큰 빈하용 작가를 위해 그의 어머니가 특별히 공수해왔다는 의자도 온기를 잃은 지 오랩니다.

소년의 꿈은 4월 16일, 멈췄습니다. 이제 유작이 된 그의 작품만이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저는 소년의 그림 앞에 한 참을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림 속 빈하용 작가가 제게 물어왔습니다. “내가 그토록 살고 싶던 내일은 어땠나요?”. “살아있어 슬픈가요? 행복한가요?”, “왜 나는 죽어야 했나요?”, “왜 구조되지 못했나요?” ……. 나는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망각의 시간

200여일이 훌쩍 지났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4월 16일 이전과 이후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정부는 빨리 ‘세월호’를 종료시키려 애씁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보다 더 빨리 ‘잊혀가는’ 4월 16일, 기억의 속도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수능이 찾아왔고, 추위가 몰려오고, 첫 눈을 기다리고,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우주를 물속에 묻은 채로 말입니다.






 

▣ 단원고 故박예슬 양 전시회에서, 故 빈하용 전시회를 기획한

  -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 인터뷰

 

 

 

 

장영승 대표는,

문화기획자이자 서촌갤러리 대표로,

故 박예슬 양, 故 빈하용 군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故 김시연 양의 노래를 뮤직비디오로 만들기도 했고,

사제가 꿈이었던 故 박성호 군을 위해 성호 성당을 완성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자발적 시민모임

세월호 가족 지원 네트워크를 통해

아이들의 꿈을 이뤄주는 활동을 자원,

다방면으로 펼치고 있다.

 

Q. 별이 된 단원고 학생들의 꿈을 이뤄주는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신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이 작업에 뛰어드신 이유는?

 

4월 16일 이후, 고민했다. ‘기억하겠다’는 건 대체 뭘 기억하겠다는 건지, ‘잊지 않겠다’는 건 뭘 잊지 않겠다는 건지. 세월호 사건의 진실,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깨달음을 기억하겠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기억과 깨달음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나는 그 시작점에서 대체 어떤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으로 죄 없이 희생이 되었는가, 그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분향소 안에서만 있는 아이들을 우리들 곁으로 놔주고 싶었다. 물론 나의 활동은 ‘잊지 않겠다’는 시작에 불과하다.

 

Q. <세월호 가족 지원네트워크>를 통해, 아이들의 꿈을 이뤄주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기까지 어려웠던 점은?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대답일 테지만, ‘돈’이었다. 처음에는 금전적 지원을 한 두 명의 개인이 자발적으로 지원했지만, 이제는 그 규모를 넘어선 상태다. 하지만 유가족의 자존심을 지켜주며, 유가족들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아 일절 모금행위를 하지 않았다. 사비를 들여, 여기까지 이어온 상황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겠다.

 

Q. 세월호 사고 첫 날, 그 기억으로 돌아가 봤으면 하는데요. 처음 속보가 나왔을 때 대표님은 뭐하고 있었는지, 그때 심정은?

사고 소식을 듣고 전원 구조 속보를 보았다. 업무를 계속 보다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와서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속보를 보게 되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 때 마음은 누구나 다 같았을 것이다.

 

Q. 빈하용 전시회가 계속 되고 있다. 전시회를 기획한 취지나 전시 콘셉트에 대해 소개해 준다면?

故 박예슬 전시회 때는 홍보를 많이 했는데, 故 빈하용 전시회는 와달라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하용이 부모님께서 전시를 허락을 해주신 조건이 ‘미디어 노출, 하용이의 개인 정보가 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오로지 하용이 그림을 가지고 전시를 하는 상황, 하용이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해 ‘작품’ 자체를 감상하는 전시를 열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은, 관람객은 아주 많지 않지만 미술 쪽 전문가들은 거의 왔다갔을 정도로 미술계 내에서는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Q. 세월호 유가족 지원 활동을 하고 계신데, 아직도 가슴에 남는 세월호 유가족의 말씀이 있다면?

최근에 故 유예은 양의 어머님께서 SNS 쪽지를 주셨다. ‘우리는 아직 4‧16 그날의 어른입니다’라는 메시지였다. 아프지만 예리한 말씀이었다. 우리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유가족도, 유가족을 돕겠다는 우리도, 세월호 희생자를 위해 촛불을 든 우리 모두, 어쩌면 정치인도 마찬가지 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어떠한 진실을 규명할 수 없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도 없다.

 

Q. ‘2014년 4월 16일을 겪은 우리’! 여전히 우리 사회는 416을 잊으려는 자들과 잊지 않으려는 자들로 양분되어 있다. 416을 잊지 않기 위해, 많은 분들이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조언해 주신다면?

냉정하게 모든 국민이 세월호를 이야기하며 살아 갈 순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시 일상 속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 생활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변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이들을 잊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한 세월호 진실규명에 가까이 있는 분들은 국민들이 새로운 힘과 원동력을 가지고 세월호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끌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