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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숨쉬는 4.16

세월호 유가족, 기억을 걷다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기획 <숨쉬는 4.16> 세월호 유가족. 기억을 걷다 / 2015년 2월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이 세월호 대참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기획 연재하고 있는 <숨쉬는 4.16>, 2015년 2월에는 유가족과 뜻있는 시민들이 팽목항까지 걸어간 일정 중 일부 구간을 함께 한 작가의 글을 올린다. 사고발생 30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픔과 슬픔은 계속되고 있으며 납득할만한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인양으로 진실을 규명하자는 유가족의 목소리가 또다시 가라앉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을 쓴 조연미씨는 대전에서 방송작가 활동을 하며 다양한 스토리 콘텐츠 작업을 하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다.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이 마련한 이 기획은 2017년 4월까지 이어지며 매달 16일마다 연재한다.

                                                

 

기억을 걷는 시간

 

300여일의 시간이 지났다. 맹골수도의 조류처럼, 어느 지도자의 망각처럼. 적어도 제 3자에겐 망각의 속도가 기억보다 훨씬 빠르다. 망각은 저절로 이뤄지고, 기억은 끄집어내야만 지속되니까.

4월 16일,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스팔트로 나섰다. 세월호 실종자 수색과 진실규명,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는 안산에서 팽목까지 도보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도보행진 6일째 되는 날, 그들이 대전에 도착했다. 300여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세월호 유가족의 뒤를 따랐다. 대전 시내 곳곳에 노란 리본도 묶였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걸음은 이어졌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필자는 이 노래를 기억한다. 작년 8월 14일, 대전 유성의 한 성당에서 세월호 희생자 故김웅기 군의 아버지인 김학일 씨가 부른 노래였다. 김학일 씨는 아들 웅기 군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메고 안산에서 팽목을 돌아 대전까지 9만 리 순례를 했다. 순례의 끝, 작은 음악회에서 그는 이 노래를 순례단에 들려주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아직은 더 울어달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바람이 가사에 배어 나왔다.

 

그대 보내고 멀리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내리는 못다 한 날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노래 중에서-

 

 

다섯달 후, 필자는 김학일 씨의 눈빛과 목소리를 똑 닮은 청년을 만나게 됐다. 김학일 씨의 큰 아들이자 故 김웅기 군의 형 김인기 군이다.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처음으로 묻는 말은 무엇이어야 할까?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인터뷰를 하자고 해놓고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한마디 꺼냈다. “어떻게 보내셨어요?” 김인기 씨는 담담하게, 때론 생생하게 웅기에 대한 기억과 4월 16일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월호 희생자 故김웅기 군의 큰 형, 김인기씨 이야기]

 

 

 

“웅기야, 너를 마음에서 보내는 날이 내 마지막일 거야.”

 

수학여행을 가는 날, 제가 가방을 싸줬어요.

 

아침에 잘 가라고 인사하고. 그냥 그렇게 보냈죠. 남자 형제들이다 보니까 살갑진 않았어요. 그래도 우리에겐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어요. 4월 16일 9시 20분쯤이었어요. 막내한테 문자가 온 거에요. “형, 지금 배가 기울고 있어. 기울기가 45도야” 그래서 제가 어이가 없어서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했더니 “해경이 왔대” 그러는 거 에요. 그래서 제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죠. 9시 25분 쯤 이었어요.

그날 출근을 못하고 곧장 진도체육관으로 내려갔어요. 솔직히 설마 했어요. 저는 그냥 인근 어민들이 애를 데려다 밥이라도 한 끼 먹여서 데려다 주겠지 했어요. 이건 말이 안 되니까요. 4월 29일에 동생이 나왔는데 동생을 볼 때까지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같은 방에 있었던 4명 윤수, 신욱이, 호연이 까지 웅기랑 같은 방에 있던 친구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4명이 같이 시신이 올라오더라고요.

 

막내가 그렇게 되고 울지도 못했어요.

 

막내를 나름 내 방식대로 예뻐한다는 게, 형으로서 할 수 있었던 표현을 따뜻하게 못해줬어요. “남자니까 울지도 말아야 한다”, “어디 가서나 당당하고 말도 잘하고 기죽지 말고 그렇게 살아야한다” 그런 말을 해줬어요. 그랬던 큰형이 지 앞에서 울고 있어 봐요. 창피해서 울지도 못했어요. (팽목항 임치안치소에서) 저는 동생이 있던 그 자리에서 나가지도 못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가기 전 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한 번 만져보고 미안하다는 소리를 처음 했어요. 형이 다 미안하고, 제일 미안한 건 물 속에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형이 끝까지 잘 보내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조금만. 그 다음부터는 임시 염할 때부터, 고대병원에 도착해서 영안실 들어가지 전까지 입관식 준비 할 때까지 다 들어갔어요. 관계자들이 못 들어오게 해도 억지로 들어갔어요. 왜냐하면 이 모습이나 저 모습이나 제 동생이고, 어차피 마지막 기억은 제가 안고 가는 거니까요. 혼자가면 얼마나 그게 불쌍하고 쓸쓸해요.

 

모습들이 매일매일 변해가더라고요.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모습이 매일매일 변해가더라고요. 최대한 빨리 보내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장례미사도 못 올렸어요. 너무  미안하지만. ‘계속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참아라. 곧 보내줄게.’ 동생에게 말했어요. 마지막으로 화장터 가서도  제가 안에 같이 들어갔어요. 불 속으로 제 손으로 동생을 밀어 넣었어요. 불 속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는 이 손이 너무 싫은 거 에요. “빨리 가라고 좋은 곳에 가라고…….”

거기까지 해서 (장례는) 끝났고...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긴장을 많이 했어요. 제가 장남이고 부모님도 계시고 경황이 없다보니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서 나름대로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보려고 했거든요. 막상 다 끝내버리니까 허망하고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그 이후로 밖에도 안 나가고, 사람들도 안 만나고 혼자 매일 매일을 살았어요.

 

동생이 있는 것처럼 살아요. 사망신고도 안했어요.

 

현실적으로는 동생이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동생이 있는 것처럼 살았어요. 내 마음에서 보내기 전까지는 같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더라고요. 너무 허전하고 허무하니까 가방도 다 빨아놓고 옷도 다 빨아서 개놓고 방도 정리해놓고 언제든지 오라고요. 밥 먹을 때도 숟가락 젓가락 놓고 의자도 빼주고 말도 많이 하고요.

막내 웅기는 정말 착하고 욕심 없는 아이였어요. 돈을 줘도 자기가 돈 쓸 일이 없으면 어디다 돈을 가만히 잘 놔두고 잘 쓰지를 않아요. 요즘 애들 같지 않아서, 어디 나가서 재미있게 놀고 이런 것도 안 좋아했어요. 늘 조용조용하고 속 한번 안 썩였어요. 몸집도 조그만 해서 늘 애기 같았어요.

 

 

마음에서 동생을 놓는 날이, 저의 마지막 날일 거 에요.

 

솔직하게 저희가 지금 세월호 사고 진상규명과 인양을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만약에 진실이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전 사실 뭔가를 표현하거나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 에요. 언제가든 내 마음에서 동생을 놓는 그 날이 저에게 마지막이 될 거에요. 지금도 그래서 걷는 거 에요. 왜냐면 저는 진도체육관에서 14일 동안 동생을 기다리면서 그 기다리는 시간이 미치도록 길었어요. 하루하루가 너무 괴로웠어요. 지금 남은 9명의 가족들은 어떻겠어요? 저라면 안 살았을 거 에요. 벌써 이미 따라갔을지도 몰라요. 어떻게 버텨요. 300명 있다가, 9명 남은 건데……. 도와줘야죠, 다 같이. 희생자 중에 화물 기사님도 있고, 일반인 피해자분, 선생님까지 많이 계시잖아요. 특별법이 저희가 원하는 대로 제정되고 나쁜 사람들이 처벌받고 진실이 밝혀져도 아직 실종자 들이 물속에 있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 분들 옆에 같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걷는 거에요.

 

 

이날 이후 김인기 씨는 세월호 유가족 도보 행진단에서 떨어져 혼자 팽목항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보 행진기간 동안 받은 많은 시민의 관심과 사랑에 스스로 본분을 잃은 것 같다며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필자는 그에게서 다시 아버지 김학일 씨를 떠올렸다. 9만 리를 걸은 마지막 날, 김학일 씨는 웅기를 위해 “아직 더 울어달라고, 아직 더 슬퍼해달라고” 말했다. 김인기 씨도 그랬다. 혼자 걸으며 더 울어보고, 더 슬퍼하고 싶다고. 5개월 전 아버지가 걷던 길을 걷고 싶었던 것일 게다. ‘슬픔과 아픔’에 전면전을 선포한 두 사람, 부전자전이었다. 피하지 않고, 미루지 않고, 적극적으로 슬퍼하며, 아파하고 울어주는 것. 끝까지 고통을 나누는 것이야 말로 ‘잊지 않겠다’ 는 다짐의 완성이 아닐까.

 

 

2월 14일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 도보 행진단이 팽목항에 도착했다. 스무 명 남짓 시작했던 도보 행진단은 진도에 와서 무려 2000여 명(대책위 추산)으로 늘어났다. 진실을 인양하려는, 마지막 남은 실종자를 구하려는, 사람 길이 열린 것이다. 고통의 바다 앞에서 문화제가 시작됐다. 실종자 조은화 양의 어머니가 무대에 올라와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를 인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그의 목소리에 많은 참가자들이 눈물을 훔쳤다.

김인기씨의 말이 맞았다. 여전히 9명의 실종자가 물속에 있다. 이 나라의 지도자와 집권여당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투명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한다 해도 세월호는 현재진행형이다. 실종자 9명이 아직 물속에 있는 한, 우린 또 하루의 4월 16일을 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