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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숨쉬는 4.16

별을 향한 아버지와 딸의 기도,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기획 <숨쉬는 4.16> / 2015년 5월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이 세월호 대참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기획 연재하고 있는 <숨쉬는 4.16>.

이 기획은 2017년 4월까지 이어지며 매달 16일마다 연재한다. 

2015년 5월의 글은 삼보일배 순례단에 대한 이야기다.

5월초 대전을 지날 때 같이 참여한 조연미 작가가 이번호 글을 맡았다. 

                                                

 

별을 향한 아버지와 딸의 기도,

- 세월호 삼보일배 순례단 아빠하고 나하고’-

 

 

신이시여! 제발 아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소서.

 

아비가 하늘을 향한 첫 기도는 그랬을 것이다. 그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종교를 믿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하늘에 기도했다. 눈앞에 배가 침몰해 가는데, 그 안에 내 아들이 있는데, 나는 바다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그럴 땐 누구나 찾을 것이다. ‘기적의 존재를. 416,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일어날 기적도 누군가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비는 아들을 장례 치른 후, 팽목에서 대전까지 십자가를 지고 걸었다. 그는 신을 만났고, 신에게 아들을 부탁했다. 프란치스코 이호진, 승현군의 아버지 이야기다.

 

 

국민여러분! 저의 절을 받으시고, 304명의 희생자를 품어주소서.

 

1년 후, 그가 땅을 향해 기도한다. 세 번을 걷고, 두 팔과 두 다리를 엎드려 절을 한다. 국민에게 바치는 절이란다. 416,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별들의 영혼을 헤아려 달라는 뜻이다. 그의 기도는 가장 낮은 자세로 소리없이, 가장 깊고 슬프게 울려 퍼진다. 그렇게 그는 두 번째 기적을 향해 걷는다. 팽목에서 광화문 까지. 세월호 9명의 실종자들의 시신이 온전히 수습되기를 바라는 기적이다.

 

51, 대전시민과 만난 삼보일배 순례.

 

봄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뜨거운 5월의 초입이었다. 계룡에서 관저로 넘어가는 고개,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삼보일배 순례단이 대전 시민을 만나기 위해 한 걸음 한 절 다가왔다.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그의 누나 이아름씨, 그들과 함께하는 순례단들이 따뜻한 봄날 뜨거운 구슬땀을 흘렸다. 팽목에서 대전까지, 자가용으로 이동하면 4~5시간이 넘는 길을 무려 60여일을 거쳐 걸어온 것이다. 이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매서운 꽃샘추위를 지났고, 봄을 알리는 개나리꽃을 지났고, 봄의 끝물을 지나고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온 근육이 터지고, 피가 머리끝에서부터 다시 솟는 기분이었다. 삼보일배를 처음 해본 필자의 소감은 그랬다. 세 번의 걸음 동안 두 다리엔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했고, 절을 하고 일어나는 동안엔 온 몸이 땅에 꺼지는 듯 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렇게 30여분이 지났을까.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몸은 고통 속에 빨려 들어간 듯 했다. 하물며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은 어할까. 흔히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라 한다. 무어라 표현할 말도 없어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도 없다고 한다. 온 근육이 터지고, 피가 머리끝에서부터 솟는 이 고통을, 416일 이후의 세월호 유가족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고작 얼마 되지 않은 순례를 통해 필자가 겪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듯 했다.

 

응원과 야유, 인양과 비난.

 

51, 대전 관저동을 지나 52일 내동에서 청사까지. 53일엔 월드컵 경기장을 지나 5일 드디어 대전 일정을 마무리 했다. 10여명 남짓한 순례단은 대전 도심을 지나가며 50여명에 육박했다. 함께 절을 하고, 함께 걷고, 두 손을 모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시민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다. 온 마음으로 박수를 쳐주거나, 건강을 꼭 챙기라고, 눈시울을 붉히는 시민도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절로 대신했다. 순례단의 걸음이 더욱 힘찼다. 반면 야유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세월호 진실규명을 둘러싸고, 잊지 않으려는 이들과 기어코 잊으려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순례단을 바라보는 시민들도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단은 묵묵히 길을 걸었다. 잊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잊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기도 였을 것이다.

 

메마른 아스팔트 사이로 피어난 들 꽃.

 

필자가 길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 보니, 숫제 보이는 것은 땅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가던 길이 이렇게 생소할 줄이야. 평소에는 아파트, 도로위의 수많은 차들, 사람들이 표정이 읽히더니 삼보일배를 하는 동안에는 그저 땅의 모습만 눈에 보인다. 울퉁불퉁한 바닥, 작은 돌들,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 그리고 단단하디 단단한 아스팔트 사이를 비집고 태어난 작은 들꽃들.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우리의 모습도 그러하지 않은가. 세월호 선체의 온전한 인양과 실종자 수습, 희생자들을 위한 진실규명이야 말로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터인데, 우리 앞엔 끄덕 않는 권력자들의 단단함만이 서 있다. 진실을 알려달라고 소리치는 유가족에게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살포하고, 시행령을 통해 세월호 특별조사를 물거품으로 만들려는 권력의 힘은 아무리 쳐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바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사이에 피어난 꽃이라니. 우리가 피어야 할 진실의 꽃도 딱 그러하지 않을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비입니다.

 

유성 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하던 53, 휴식시간을 빌어 이호진씨가 말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 주실 거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절을 해보신 분을 아실 겁니다. 조금만 해도 온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움은 말도 못하죠. 그런데도 저희와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신다니. 여러분들의 고통과 땀에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도 감히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이호진씨는 애써 눈물을 감췄다. 담담한 표정과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대신했다. 하지만 함께한 모든 이들은 알고 있었다. 함께 걷고 절해주는 모든 시민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처음 거리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 말없이, 연대하고 있었다.

 

 

우리의 연대는 당신의 권력보다 강하다.

 

자식을 잃은 아비와 생면불식의 시민은 거리에서 가족이 되었다. 함께 엎드려 절하고, 도시락을 나눠먹고, 초여름의 아스팔트 열기를 느끼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함께 마셨다. 하늘로 올라간 세월호 희생자 수 백명의 별을 그리는 수많은 사람이 거리에 모였다. 세월호 희생자들은 그런 우리를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었다.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고, 웃음과 미소로 희망을 주는 사람들. 세월호를 잊지 않는 이들의 뜨거운 연대가 거리에서 맺어졌다. 돈과 권력으로 쌓아온 그들의 힘을 무너뜨릴, 사랑과 진심의 연대였다. 304명이 별이 만들어주고, 지켜주고 있는 무언의 연대는 이 길 끝에서 진실을 만나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하고 나하고, 광화문까지 삼보일배.

 

삼보일배 순례단은 대전을 떠났다. 함께한 사흘이 아쉬웠지만, 이제 그들이 길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헤어짐이 반가웠다. 한 달 여 후면, 이들은 광화문에 도착할 것이다. 깨진 무릎, 물집 잡혀 퉁퉁 불어 터진 발바닥으로. 하지만 그 길 끝에서 세월호 희생자들과 함께 반짝이는 별이었던 승현군이 아버지와 누나를 맞아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활짝 웃던, 어린 시절의 그 미소로. 따스하게 아버지와 누나를 안아줄 것이다. 그리고 속삭여줄 것이다. 나는 늘 아버지가 입맞춤 하던 땅에, 아버지가 인사하던 하늘에 있었노라고. 그리고 지금도 함께하고 있노라고.

 

 

5월이 이렇게 더웠다니,

새삼 뜨거운 이 길 위에 엎드려 있는 저를 실감합니다.

30분 동안 절을 하면,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습니다.

아플 만도 한데, 아프지 않은 이유는 우리 승현이 때문일까요.

포기하고 싶을 만도 한데,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우리 승현이 때문이겠죠.

아무리 걷고, 아무리 절을 해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행복한 이유는.

제가 승현이의 누나이기 때문입니다.

 

   - 승현군의 누나 이아름양의 페이스북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