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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숨쉬는 4.16

세월호 시국선언은 부끄러운 기성세대의 자기 고백이다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숨쉬는 4.16> 2016.10

                                                     

                                                         세월호 선언은 부끄러운 기성세대의 자기 고백이다

                                                                          -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돌아본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

 

  블랙리스트 파문이 문화예술계를 뒤흔들고 있다. 정부가 검열해야 할 문화예술계 인사 명단을 작성했다는 주장과 자료가 나오면서 논란과 의혹은 가중되고 있다. 블랙리스트가 사실이라는 주장에 대해 정부는 그렇지 않다는 반론을 내놨지만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명단에 들어있는 인사들을 몇 개의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에 세월호도 빠지지 않는다.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 촉구선언에 서명한 이들과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문학은 본래 세상의 약한 것들을 위한 것이고 세상의 가장 위태로운 경계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기억하고 그치지 않고 분노하며 끈질기게 싸울 것입니다 이러한 문학의 언어를 두려워 할 줄 아는 권력을 원합니다

  세월호 시국선언의 일부를 보더라도 문학은 소외된 사람과 그늘진 사회를 반영하는 역사적 증언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이 나서서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 시국선언을 하고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런 활동은 작가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몫이기도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해왔던 많은 이들이 세월호 사고의 충격을 공유하기위해 거리에 나왔다. 그들은 높은 정치의식을 무장한 이들이 아니었다. 상당수 많은 이들이 평범한 생활인이었다.

  그동안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이 만난 이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세월호 사고를 돌아보는 다양한 활동이 검열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자며 활동을 벌인 그들의 노력은 부조리한 삶의 환경을 바꾸려는 참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이 그들의 발언을 재구성해봤다. 최초 취재와 재구성 사이에 시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시와 지금의 활동내용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그들을 처음 취재했을 때 상황과 발언임을 밝힌다.

 

노은역 김재진씨

 20164, 대전 노은역에서 세월호 피켓을 들었던 김재진씨는 휴직을 한 선생님이다.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피켓을 들고 노란리본을 나눠줬다. ‘이런 작은 행동으로 세월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알게 되고, 잊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떠올릴 수 있다면 아마도 희망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전까지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교육이나 환경과 관련한 이슈 빼고는 정치에 대해 관심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며, 나의 무관심이 이런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나 반성을 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이 같은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노은역 광장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갔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유성여고 앞을 가게 됐죠. 그러다 매주 금요일, 아이들 등교시간에 맞춰서 노란 리본을 나눠주게 됐어요. 학생들한테 노란 리본을 나눠주는 작은 일이지만, 잠시나마 세월호를 기억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학생들이 제 블로그에 댓글을 달더라구요. ‘노란 리본 볼 때마다 잊고 살았던 내가 미안합니다.’라는 글도 있었고요. ‘이렇게 생각나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댓글, ‘음료수 드리려고 왔다가 못 뵈서 미안하다는 댓글들까지...이런 게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201412월에 단원고 교실을 갔어요. 광화문, 팽목항, 분향소에 다 다녀왔는데요. 단원고 교실은 너무 슬픈 거에요. 아이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고, 그냥 온 몸의 세포로 쫙 들어오는 거에요. 세월호의 모든 게. 저에게는 학교와 교실이 일하는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책상 하나하나 교실 한 걸음 한 걸음, 아이들의 손길이 느껴졌죠. 단원고 교실을 가보니, 별이 된 아이들의 책상에는 국화가 놓여 있었고, 생존했던 아이들의 책상만 깨끗했어요. 근데 어떤 교실은 깨끗한 책상이 하나 밖에 없는 거에요. 어디에는 서 너개 있고. 이 아이들은 살아있다고 할 수 없겠구나. 그 많은 친구가 별이 됐는데, 이 아들이 살아 있는 걸까? 하는 게 와 닿았어요.”

 

노란유산 서영석씨

서영석씨는 세 아이의 아빠이자 사진작가이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었다고 한다. 2014416일의 순간, 그의 삶은 바뀌었다.

그는 올 1월부터 점심시간 마다 세종시 해수부 앞에서 세월호 진상규명과 인양을 위한 피켓시위를 해왔다. 최근에는 노란 우산을 직접 제작해 판매를 시작했다. 수익금은 다시 우산을 구매해 나눔을 한다. 지금까지 세월호 유가족, 팽목항, 광화문 농성장, 전국의 세월호 1인 시위 현장 등에 노란 우산을 보냈다. 그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코드는 우산이다. 과연 노란 우산이 그에게 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우연히 시작됐어요. 5월부터 세월호 인양을 위해서, 해수부 앞에서 세월호 활동하는 분들과 점심 때 집중 행동을 시작했던 때였죠.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왔어요. 사람들에게 우산을 씌워주려고 펼쳤더니, 손잡이가 고장이 나 있던 거 에요. 그래서 함께 하는 분들과 세월호 기억 우산을 만들어 볼까? 시작했죠. 공장에 가서 견적을 내보니, 100개가 기본 제작이라는 겁니다 . 우리는 고작 10명 뿐 인데... 한 명당 2개 씩 사도 20개 밖에 안 되잖아요. 어떻게든 해보자는 마음으로 주문 양식을 만들고, SNS세월호 기억 우산 공동구매글을 올렸어요. 100개나 팔리면 다행이구나 생각했는데, 다음 날 주문이 몇 개 였는 줄 아세요? 무려 1000개였어요!”

 

저도 세월호 있기 전에는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왜 꼭 저렇게 나서야 되나? 조용히 기억하고 혼자 하면 되지’.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대처하는 방식들이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201458일이었어요. 집에 돌아가서 뉴스를 보는데, 유가족들이 보도국장의 교통사고발언으로 KBS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어요.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 영정을 가슴에 안고 서 있는 거에요. 그런데 한 발짝도 못가고 경찰에 막혀서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930분쯤에 여의도에 도착했어요. 유가족 옆에 서 있어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요. 유가족들과 함께 청운동으로 이동해서 새벽을 보내며 노숙을 했죠. 그래도 그냥 옆에 있어주고 싶었어요. 지켜주고 싶었어요.”

 

세월호는 서영석 씨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일산에 살던 서영석씨는 아내와 함께 세월호 활동에 매진했다. 정부의 구조 대처를 규탄하고, 진상규명 서명을 받고, 미 수습가족이 돌아오기 바라는 피켓팅을 벌였다. 명절에도 고향이 아닌 광화문을 찾아 유가족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에 서영석씨와 가족들은 세종시로 이사를 오게 됐다.

 

 

나무로 기억하는 고충환씨

톱밥이 날리는 사이에 나무향이 짙게 퍼지는 곳. 공방의 주인장은 50대 중반의 목수 고충환 씨다. 그는 책상, 의자, 수납장을 비롯해 손님들이 주문하는 가구들을 만든다. 나무를 본격적으로 만진지 어느새 10년 세월이다. 그동안 사연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지금은 나무를 통해 죽음을 기억하는 소중한 작업에 많은 의미를 두고 있다. 그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때로는 나무에 생명의 이름을 각인하는 고통의 구도자 모습이 겹쳐지기도 한다.

지난해 말부터 그가 마음을 담아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나무에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불도장을 찍어 작은 고리를 만드는 일이다. 지금까지 작업해 나눠준 개수만 해도 8천 여개를 넘는다. 서울, 광주, 전주, 부산, 대구, 포항 등 경향각지로 나가고 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이후 집회에 수시로 참여를 했죠. 집회나 시위에 나가면서 이런 행동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러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했고 그러던 참에 나는 어차피 나무 다루는 사람이니까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이런 나무고리가 나오게 된거죠

 

다른 작업과 달리 마음이 사뭇 다르죠. 보통은 일상적으로 들어오는 주문 작업을 끝내고 밤에 고리 만드는 작업 진행하는데요. 때로는 마음이 복잡하고 심난하기도 하지만 막상 불도장을 찍고 고리를 다듬고 있으면 새겨진 글처럼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이런 생각을 더욱 간절하게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세월호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죠. 참으로 작은 일이지만 이런 작업이 유가족들에 위로나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더불어 내 자신의 마음을 다듬는 시간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성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경건한 자세가 든다는 점에서 말이죠.”

 

 

보통아줌마 정서희씨

죽음의 순간에도 삶은 탄생한다. 죽음을 목격하면서 얻은 삶이기에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4416, 그녀의 뱃속에서 새생명이 태어났다. 제주섬을 밟지 못한 채 진도 앞 바다에서 푸른 청춘들이 숨진 그 날이었다.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운다고 했던가. 정서희 씨가 당진버스터미널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 것은 그들의 죽음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면서 나오게 됐죠. 제가 처음 나온 게 막내가 5개월 차 되던 때였어요. 829일에 처음 당진 버스터미널 앞에 섰죠. 엄마들 모임하는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어요. 제가 나가고 싶은데 같이 해주실 분 없냐고 했죠. 사실 혼자 서기에 겁이 나기도 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한 두명씩 참여하는 분들이 늘었구요. 음료수랑 빵을 사주면서 격려하는 분들도 생겼어요.”

 

당진버스터미널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는 분들은 10명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번갈아가면서 1인 시위 릴레이를 벌이고 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주 5일제 근무와 같은 의무감으로 그들은 피켓을 들고 노란리본을 나눠주고 있다

 

저는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현실에 관심이 거의 없었어요. 집에서 애를 보고 있었고, 아이들 친구 엄마 만나서 수다 떠는 게 대부분이었어요. 세월호 사고 이후 제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 건 분명합니다. 그때부터 전태일 평전도 읽어봤고, 우리나라 역사의 참혹함을 알게 됐죠. 그러면서 무관심한 것이 또다른 상처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됐어요. 더 나아가 연대라는 것도 알게 됐던 것 같아요. 세월호 시위 활동을 하다가 다른 지역에서 1인 시위 하는 분들 만나면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욱 끈끈한 감정을 느끼게 되요. 그런 게 연대가 아닌가 싶어요. 서울에 백화점 앞에 간 적이 있었는데 고공농성하신 분을 처음 봤어요. 그 분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느낌이 들더라구요. 제가 세월호 1인 시위를 하면서 많이 울었거든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면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봅니다

 

 

바느질하는 박민선씨

서른 아홉 평범하게 살아온 박민선씨가 세월호의 아이들을 위해 인형을 만들고 소품을 만든 건 2014년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바느질을 좋아했다. 직장 생활하는 과정에서는 바느질을 할 시간이 없었지만 둘째 아이가 조금 크고 난 이후에는 손바느질과 퀼트를 했다. 재봉틀을 이용해 옷을 만들었고 가방을 만들기도 했다. 바느질 솜씨가 이렇게 세월호를 기억할 줄은 그녀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솜씨를 발휘해 세월호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꿈을 형상화하고 있다. 아이들의 소망을 소품에 담으며 그들을 달래주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아이들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모두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이왕 하는 거면 이름만 새기기보다 기억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서 사연이 알려진 아이들부터 하기 시작했죠. 한겨레신문에서 아이들의 사연을 연재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런 내용을 보면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아이들의 절반 이상을 만들었네요.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 한 명 한 명 다 예쁘잖아요. 아이가 좋아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또 아이들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싶어서 아이의 특징과 연관지어 인형을 만들었죠

바느질 자체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아요. 빨리 하면 하루 꼬박 걸리는데요. 근데 이 작업을 하려면 여러 생각을 해야 되잖아요. 아이의 꿈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하죠. 아이 별명이 마이콜인 친구는 마이콜 모양으로 만들었구요. 약사가 꿈인 아이들도 여러 명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약국 표시를 해서 꿈을 나타내곤 하죠. 아이의 꿈을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만들까 생각하는 게 가장 어려워요. 아이들의 꿈을 공책에 적고 또 아이들 사진을 보고 생각하거든요. 생각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아요”.

 

제각각 기억하는 방식은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재능과 노력으로 기억한다. 평범한 이들이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는 이유는 어이없는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삶을 돌아본다. 그 삶이 온전한 삶이었는지 돌아보는 순간, 삶은 더욱 경건해진다. 결국 그들은 아름다운 모두의 삶을 위해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고 다양한 활동에 참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들은 이름 석자만 성명서에 올렸을 뿐이다. 그중에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고 또 마음만 간직한 채 생업에 몰두하는 작가도 있다.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이름 석자가 논란이 되는 시대. 중요한 것은 알려야 할 것을 알리고,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과정에 검열의 날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삶을 검열할 수 없다. 작가든 평범한 사람이든 그 누구도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신념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작가들의 세월호 시국선언은 부끄러운 기성세대의 자기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