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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숨쉬는 4.16

기억과의 투쟁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기획 <숨쉬는 4.16> 2017년 7월

 

세월호는 기억과의 투쟁입니다.

-매주 토요일 대전 으능정이 거리에서 리본 나누는 빈들청년공동체 -

 

2017714. 33개월 만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714, 인사혁신처는 위험직무 순직 보상심사위를 열었다. 단원고 교사 김초원, 이지혜 선생님의 순직을 인정한 것이다. 지난 7일에는 세월호 선체조사위가 원점부터 재조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너무나 당연하게 했어야 할 일들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늦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기억이 사실을 따라가지 못할 때, 세월호 아이들의 기사를 보고도 무심코 넘어갈 때, 광화문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여전히 있음을 잊고 있었을 때... 기억이 너무 무뎌진 건 아닐까? 가방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을 다시 매만져 보라는 신호다.

 

 

기억의 등대, 빈들청년들의 노란 리본 나눔

 

빈들청년공동체의 노란리본 나눔&피켓 활동은 가물가물해져가는 세월호에 대한 기억의 저편에서 우리를 붙잡아주기 위한 등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빈들청년공동체는 대전 빈들교회가 가진 방향성과 가치를 이어받아, 세상 속에서 함께 실천하고 공유하는 청년 모임이다. 목회나 복음 활동 뿐 아니라 세상과의 소통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특히 세월호 리본 나눔, 성주 사드 반대 활동,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등 우리 사회의 수많은 고통과 상처의 현장에서 손을 잡아주었다. 빈들청년공동체는 2015년 겨울부터 매주 토요일 3~5시까지 노란 리본 나눔과 세월호 기억 관련 피켓팅을 벌이고 있다. 따로 약속은 하지 않으며, 시간이 되는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나오는데 많게는 7명에서 적게는 3명이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2017715일 토요일, 후덥지근한 으능정이 거리에서 노란 리본을 나눠주고 있는 빈들청년공동체 중 남누리, 원찬호, 박정현 씨를 만났다.

 

Sorry Christmas

 

(남누리 씨) “2015년 말 쯤에 저희 교회 청년부 주관으로 세월호 미수습자(당시 미수습자) 부모님의 간담회를 열었어요. 보다 많은 청년이 와서 듣고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보물도 1천 장 가량 만들어 나눠주고, 각 대학교와 학생회 등을 열심히 다니면서 간담회를 알렸죠. 그런데 알리는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거부 반응도 보였고, 무관심도 느꼈어요. ‘,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이렇게 멀어졌구나.’ 싶었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빈들 청년들이 모여서 고민을 했어요. 그때 유랑자 이명영 님이 노란 리본 나눔을 하는 걸 알게 됐고, 매주 토요일 마다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빈들청년공동체는 2015년부터 대전 으능정이 거리에서 유랑자 이명영 씨와 노란리본 나눔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첫날은 공교롭게도 1224,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아 거리마다 온 세상에 평화와 축복을 기리는 그날. 남누리 씨는 거리에서 슬픈 크리스마스를 느꼈다.

 

“Merry Christmas라고 하잖아요. 크리스마스만 되면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져요. 거리의 분위기도 좋고, 캐럴도 울리고요. 가족들끼리 모여서 촛불도 켜고, 밥도 먹고 그 날만큼은 평안한 하루를 보내는 날이에요. 그런데 1224일 처음으로 거리에 나와 세월호를 알리며 제가 느낀 기분은 안타까움이었어요.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슬펐어요. 저에게는 너무나 슬픈 Sorry Christmas이었어요.”

 


 

 

 

 

 

냉담 속에 찾은 희망

 

세상 사람들의 세월호에 대한 무관심의 크기만큼, 12월의 날씨처럼. 첫 리본 나눔을 하던 날은 매우 추웠다는 한 마디를 먼저 전한 원찬호 씨. 원찬호 씨는 첫 리본 나눔의 기억을 냉담 속에 찾은 희망이라고 밝혔다.

 

처음에요? 매우 추웠어요. (웃음) 그런데 막상 피켓팅을 했을 때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고 가시고, 리본도 받더라고요. 조금의 희망을 본 것 같아요. 아예 무관심할 줄 알았는데, 저희의 세월호 행동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꽤 있는 걸 보니 희망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 희망을 따라서 여기 까지 온 것 같습니다.”

 

(박정현 씨) “올해 초였는데요. 어떤 분이 노란 리본을 몇 십 개 씩 달라고 하셨어요. 알고 보니 선생님이시더라고요. 자기 학생들하고 함께 나누면서 세월호를 기억하고 싶데요.그 선생님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예전에는 학교에서 노란리본을 못 달게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조금씩 사회가 변한 거 에요.”

오랫동안 자발적으로 세월호 기억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세월호 이후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모양이다. 세월호를 철저하게 배제 했던 정부, 그로 인한 사람들의 냉담과 무관심, 하지만 결국엔 드러내지 못했을 뿐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는 희망이다. 빈들청년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27개월 간 사회의 냉담이 이어진 거리에 서, 작은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세월호는 기억과의 투쟁일지도...

 

잠깐 눈감으면 멀어지는 것이 인간의 기억이다. 그래서 남누리 씨에게 세월호는 망각과의 투쟁이다. 남누리씨는 사실 세월호 사고를 군대에서 접했다. 2014416, 초년병시절이었고 최전방에서 근무하다 뉴스를 접했다. ‘사고가 크게 났구나.’ 정도만 생각했단다. 2015년 제대를 한 후 알게 된 사실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사실 맨 처음 일어났을 때 이렇게 심각한 일인지 몰랐어요. 최전방에 있어서 교대근무를 했으니까 TV도 자주 못 봤고요. 그러고 제대후 사회에 나갔는데 사람들이 세월호얘기를 하니까, 왜 그러지? 했었어요. 사고 당시 뉴스를 찾아봤죠. 세월호 주위에 헬기가 돌아다니고, 해경은 멀찌감치 구조정에 있고, 망망대해에 세월호만 떠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해요. 한 명이라도 구해야 되는데 해경은 아무것도 안했을까? 그게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혼란스럽고 힘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 건지? 계속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됐어요. 어찌 보면 세월호에 빚을 진거죠. 그로 인해 세상에 눈을 떴으니까요.”

 

매주 토요일, 청년들이 황금 같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낸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무려 27개월 간 이어왔기 때문일까? 친구와의 약속도, 중요한 일정도 토요일은 재끼고일정을 잡을 정도로 일상이 되었다는 이들. 빈들청년들에게 여유와 에너지가 느껴졌다. 사람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고 세월호가 기억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이들은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고 거리에 나올 것 같다는 묘한 믿음이 느껴졌다.

 

(남누리씨) “그래도 빨리 끝나면 좋겠죠. 미수습자들도 돌아오고, 진실도 밝혀지고요. 사실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요. 처음 시작할 때, 지금까지 올 거라고 생각했다면 못했을지도 몰라요. 미수습자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나온 게 벌써 두 번째 겨울을 지나 여름을 맞았습니다. 세월호는 저에게 기억과의 투쟁이에요. 기억이라는 게 잠깐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 새 멀리 도망가 버리잖아요. 그래서 매 순간마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붙잡으려고 노력해요. ‘안일해지지 말아야지. 세월호를 잊지 않아야지.’하는 마음이요. 세월호 리본 나눔은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몸부림이랄까요. 저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투쟁이에요.”

 

시커먼 구름과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빈들청년들에서 시민의 손으로 전해진 노란 리본이 빛에 반짝여 흔들거렸다. 노란 리본이 온 몸으로 질문하는 듯 했다. ‘지금도 잊지 않고 있냐고.’, ‘정말 잊지 않고 있냐고.’ 빈들 청년들이 매주 토요일,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유일 것이다.

 

(원찬호 씨) “잘못된 사회에 맞서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제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거리로 나오게 된 거죠. 세월호는 더 이상 하나의 세월호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의 많은 잘못된 구조가 사실 세월호 인거죠.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 것, 세월호 행동을 하는 것 또한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정현 씨) 제가 거리로 나온 건, 안산 사는 친척 동생 때문이었어요. 동생의 중학교 동창 두 명이 세월호 희생자였거든요.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미수습자들도 여전히 배 안에 있고요. 그래서 오늘도 리본을 들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 선원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주황 리본도 나눠주고 있어요. 스텔라 데이지호에서 아직 찾지 못한 구병벌이 오렌지색이라고 해요. 지난주에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100일이 됐습니다. 스텔라데이지호의 가족을 기다리는 분들과 세월호에서 가족을 기다리는 분들의 마음은 같지 않을까요?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하는 마음으로 거리로 나섭니다.”

 

(남누리 씨) 저한테 세월호는 기억을 붙잡는 노력입니다. ‘기억합니다.’,‘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세월호 앞에 많이 사용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잊지 않았는지, 나는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지 되돌아보게 되거든요. 노란 리본 또한 마찬가지 인 것 같아요. 노란 리본을 달고, 세월호 배지를 다는 행동은 아직도 잊지 않았니?’라는 물음이고, 또 물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나누는 노란 리본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세월호와 기억의 메시지를 다시 던져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의미대로 빈들청년공동체는 대전 으능정이 거리에 섰다. 특별히 언제까지 일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한 거리에서 더 많은 이들에게 노란 리본과 기억의 물음을 던져 보고 싶다고도 했다. 이들의 물음에, 우리가 답할 차례다. 빈들청년들에게 받은 노란 리본과 주황색 리본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다시 묻는다. “우리는 잊지 않고 있냐고?”

 

) 빈들청년공동체에서 특별히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거리에서 빵도 주시고, 음료수도 주시며 응원해 주신 분들. 그리고 노란 리본을 지금까지 만들어주신 국민TV 대전 지협분들, 노란 리본 아저씨 유랑자 이명영 님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분들이 노란 리본을 만들어주셨고, 거리에 서주셨기 때문에 저희도 꾸준히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 활동은 참 신기합니다. 혼자서는 절대 이어갈 수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하고, 그 기억의 끈이 이어져서 또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같습니다. 함께 기억의 끈을 이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