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2013.11.26 14:00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 - 대전창작센터

빈집을 채우고 살고 싶은 마음

 

 사람의 온기가 떠나버린 빈집,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건물,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오래된 창고…. 여전히 도시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흉물이 되어버린 곳들이다. 이런 공간들이 생명력을 얻고 다시 쓸모 있는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인 대전창작센터를 둘러보며 그 답을 얻었다. 시작은 ‘관심’이었다. 

      

“현재까지 도심 속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로서 대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잖아요. 이 공간을 정말 예쁘게 잘 꾸며서 대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재미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8년 정식으로 개관한 대전창작센터는 국내 최초로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만들어진 복합문화센터다. 이곳은 1958년 농산물 검사소 대전지소가 자리했던 관공서 건물로 1999년 ‘대전시 좋은 건축물 40선’에 선정됐고, 2004년 9월에는 등록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한국 근대건축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지역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1999년 (구)국립 농산물 품질관리원 충청지원이 이사를 간 후, 줄곧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던 빈 공간이기도 했다. 건물 주변은 언제나 한산했다. 지하상가 입구가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인적이 드물어 스산한 기운마저 느껴졌던 곳. 어쩌면 그렇게 오랫동안 도시의 흉물로 남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건물이 조금씩 사람의 온기를 머금기 시작한 것은 바로 2005년부터다.

 

이러한 변화는 대전시립미술관 김민기 학예연구사의 작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대전시립미술관은 병원 로비, 도서관, 지하상가, 대흥동 골목 등의 미술관 밖 공간을 활용한 <열린미술관> 전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전시 프로그램 기획에 몰두하고 있었던 김민기 학예연구사는 도심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대전창작센터 건물을 눈여겨보았고, 관리부처인 보훈청에 <열린미술관> 전시를 제안했다. 그 후 2년에 걸쳐 2회의 기획전시를 진행했고,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대전창작센터 개관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건물이 지어진 1958년 당시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작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현대의 미술전시 시스템을 어떻게 잘 연결해놓느냐가 관건이었는데, 문화재청 위원들에게 자문과 심의를 받아서 모든 작업을 진행했고 건물 외벽 색깔은 물론 구조 하나하나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과거는 복원하되 미래를 본다
대전시립미술관의 <열린미술관> 전시가 진행되면서 대전창작센터 건물의 관리부처가 보훈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됐다. 그리고 대전시는 문화재청과의 계약을 통해 대전시립미술관이 현재 대전창작센터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영구 활용할 수 있도록 일을 진행했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리모델링 당시 건물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낡은 지붕 기와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어와 건물 내부 곳곳의 시멘트가 떨어져나갔고, 외벽의 페인트칠도 벗겨진 부분이 많았다. 또한 건물 뒤편에는 설계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창고가 증축되어 있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었다. 먼저 빗물이 새는 지붕 보수를 위해 1958년에 만들어진 기와를 찾아 나섰다.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똑같은 기와를 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이 따랐다. 수소문 끝에 경상남도에서 건축 당시 쓰였던 기와를 찾아낸 것이다. 외벽의 페인트 역시 처음 색을 그대로 연출했다. 또한 1층에는 보존돼 있지만 2층에는 그 흔적만 남아있던 창문 설비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건물 내부의 천장, 계단 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부 전시장은 되도록 못질을 하지 않고 벽을 세워 만들었다. 대전창작센터가 아닌 근대건축 문화재로서의 가치 또한 함께 보존해나가기 위해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잃어버렸던 건물의 시간과 역사를 되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으로서 대전창작센터는 대전의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것, 신기한 것,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설치, 마술, 착시, 미디어를 활용한 기획 전시를 통해 사람들이 미술에 재미를 느끼고, 그런 미술이 사람들의 일상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유도했죠.”

2층 전시장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스크린이 덩그러니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호기심에 한 발짝 걸음을 옮기던 순간,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김민기 학예연구사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에 의해 움직이는 영상이다.

 

2013년 11월 17일까지 진행되는 <프로젝트리뷰 2013-공존> 전시 작품 중 하나로 미디어 아티스트 5명과 소설가 1명, 그리고 과학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 작업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티스트들의 예술적 감각과 반짝이는 아이디어, 첨단과학의 섬세함과 놀라움도 만날 수 있다. 실험적이지만 결코 어렵지 않은 작품들로 눈길을 끄는 전시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국유재산이기 때문에 대관 전시를 할 수 없는 대전창작센터에서는 일 년에 4회 정도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실험적이고 대중적인 요소들을 전시의 주요 테마로 삼는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에 활력을 주고 즐거움이 되는 전시를 통해, 거리 미술관의 높은 문턱을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게 낮추는 것이 목적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주변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주말이면 외지에서 찾아오는 관람객들도 점점 그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흔히 대전의 문화예술을 논할 때, 지역출신 작가들의 활동이 많지 않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활동하는 작가들의 수가 많지 않고, 문화예술 활동의 규모는 작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지역에 흡수되지 않고 대전만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대전창작센터는 개관 초기 ‘아티스트 스터디’라는 그룹을 운영했다. 젊은 작가들이 모여 서로의 작품에 대해 논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함께 공유하는 모임으로 100명에 가까운 젊은 작가들이 이 스터디에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대전창작센터는 ‘대전예술 114’라는 별칭을 얻었다. 안으로는 젊은 지역작가들의 소통 공간, 밖으로는 대전지역 작가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네트워크의 중심이 된 것이다.

대전은 한 때 문화예술의 불모지라 불리기도 했다. 젊은 작가들이 활동하기에는 너무나 좁은 동네였고,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해줄 만한 인적, 물적 기반도 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원도심 활성화를 시작으로 도시문화를 새롭게 만들고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동안 음지에서만 활동해왔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서서히 따뜻한 햇볕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 어떤 지역보다 뚜렷한 색을 지닌 문화예술도시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 대전. 그 출발선에서 대전창작센터는 대전 문화예술을 이끌어갈 구심점이 되기 위해 오늘도 한발 한발 조심스런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원도심은 창작센터 기억의 원형이다 / 창작센터의 주요 전시활동

대전창작센터가 대흥동과 원도심을 주제로 기획한 전시의 면면을 보면 대전창작센터가 지향하는 지점을 엿볼 수 있다.지리적으로도 원도심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전미술의 흐름을 놓치지 않겠다는 작은 의지의 표현이자 실천이다.

2010년 8월에 열린 <열린미술관 – 대전블스>전시가 그 시작이었다. 이 전시는 그동안 대흥동에 대해 재조명하지 못했던 시간, 장소성에 주목하고 대전미술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전시로 다양한 실험미술과 옛날 대흥동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신문스크랩, 전시오픈기념으로 촬영한 옛날사진을 등을 선보였다다. 뿐만아니라 대흥동의 오랜 시간과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작가와 화랑대표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옛날 대흥동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영상,  대전여상 학생들이 대흥동의 현재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들을 수집, 전시하여 대흥동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전시로 평가받았다.

 


대흥동예술가들1950~60년대  /2011-03-04 ~ 2011-04-17.
1950~60년대 대흥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 및 예술관련 자료들을 살펴봄으로써 지역미술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 미술자료의 가치 및 그것을 수집하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미술관 아카이브 구축 사업의 중요성을 제기하고자 개최한 전시였다. 또한 대전미술의 초석이었던 주요 작가의 작품 및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소장자를 찾아 자료의 기증 및 자료대여 등의 협조를 기대하는 것도 전시의 목적으로 삼았다.

대전미술아카이브 2012:1950~60년대 고교미술활동 부대행사/2012.05.25 ~ 2012.08.19
 이 전시는 대전미술의 생성과 발전, 그 흐름을 살펴보는 전시로 <대전미술 아카이브 2011:대흥동화가들>전과 연속성을 갖는 전시이다. 대전지역에 미술활동 기록이 나타난 것은 이동훈, 박성섭, 김기숙이 미술교사로 활동한 1940년대로, 그 이후 1970년대 대전에 미술대학이 설립되기까지 외부에서 미술교사로 유입된 미술인과 그들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은 중등학교 학생들의 움직임이 미술활동의 대부분이었다는 것에 전시의 초점을 맞추었다.
6. 25전쟁 이후 대전에는 재건의 움직임과 함께 초등학교가 급격히 늘어나고 중등학교는 중학교, 고등학교로 분리되며 미술교육이 미흡하나마 활발해지는 시기였다. 대전의 여건은 여전히 타 도시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지만 계속되는 중, 고등학교의 설립으로 미술교사의 유입이 늘어나게 되고, 이들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미술반 활동을 시작으로 미술활동인구의 저변을 넓혀 가게 된다. 대전에 미술대학이 설립된 것은 1970년 대전실업초급대학에서 생활미술과의 설립과 1973년 목원대학교와 숭전대학교에 미술학과 설립되기 전까지는 고교미술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대전미술에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활동은 단지 고교서클 활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현재 우리나라 화단에 중진작가들이 되었다는 것은 대전미술사를 기술할 때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대전에 최초의 연합서클은 1958년에 결성하여 전시를 개최했던 ‘루-불 미술동인’이다.
 이 전시는 그들의 활동 당시 제작되었던 작품 혹은 근접년도의 작품을 전시하여 1950~60년대의 작품양상을 살펴보고, 기록물들(리플렛, 사진, 서신, 카드 등)을 함께 전시해 그 시대의 여건과 활동들을 전하고자 했다.

 

 

프로젝트대전.2012 원도심 프로젝트 / 2012-09-19 ~ 2012-11-18
<원도심 프로젝트>는 다양한 조형예술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17인을 초대하여 대전 원도심 대흥동 일대에서 '지역재생' 프로젝트를 확장된 커뮤니티아트로서 실현하고자 했다.
'예술'은 '도시'를 재생하는 에너지로 사용되어 (원)주민의 사적인 삶과 공적(경제적)인 삶의 현장에 직접 투입된다. 이에 17인의 예술가들은 주민들의 현장에서 작업하며 그들의 참여를 유도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도시민의 시선과 초상 그리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위트와 심도 있게 그려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프로젝트는 각 장소에서 과거의 역사성과 현재의 장소성을 담아내고 나아가 미래의 경제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향후 다양한 문화프로젝트를 포함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발전시켜 대전의 생성과정과 도시개발에 따른 딜레마를 밝혀내는 기회로써 대전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대전미술의 새물결 대전미술아카이브 2013  / 2013-05-24 ~ 2013-08-25
대전미술은 도시형성기인 1920년대 학교가 세워지고 미술교사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1940년 이전까지는 뚜렷한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40년대 이후 도시가 발전하고 학교의 수도 늘어남에 따라 미술인구도 늘어나고, 개별적인 작품활동과 그룹전 등이 열리면서 미술문화가 활기를 띄게 된다. 그러나 중등학교를 미술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술기반은 자립성을 갖추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후 50년대와 60년대에 들어와서 미술활동은 눈에 띠게 증가하지만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선 여전이 외지(미술대학에 입학하기 위해)로 나가고 신인등용을 위한 변변한 미술대전도 개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미술전문 교육기관이 신설되고 국전성격과 같은 미술계의 신인 등용문인 ‘충청남도 미술대전’이 개최되면서 대전현대미술은 경쟁력과 자생력을 갖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 대전지역은 목원대와 숭전대(현 한남대)에 미술학과 신설이 되고 1971년에는 충남미술대전이 개최되면서 대전지역은 미술전문인을 배출하고 미술에 등용할 수 기회가 넓혀지게 된다. 이에 따라 미술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작품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화랑들이 잇따라 개관되고 미술 활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며 자생력을 확보한다.
이러한 점에서 대전현대미술의 자생력과 발전을 이룬 기점을 1970년대 초반으로 규정하고, 그 역할과 파생적 영향에 대한 고찰을 위하여 전시를 기획했다.

 

대전창작센터가 대흥동과 원도심활성화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리적으로 대흥동에 자리하고 있다는 특징도 있지만 창작센터가 바라보는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전미술의 흐름을 조명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는 가운데, 대전미술의 산실인 대흥동을 주목하고 더 나아가 잊혀지고 있는 원도심의 기억을 복원함으로써 대전미술과 원도심 문화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창작센터가 창작의 흔적을 찾아내는 동안 우리의 기억도 퍼즐처럼 맞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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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2013.11.22 10:53

컨트리 음악 30년, 추억은 향수가 된다 - 팔로미노

 

1980년대 팔로미노

 

 1980년대 젊은이들은 대부분 학교나 직장에서 나오면 대흥동이나 은행동을 배회하곤 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대흥동 곳곳에 있는 카페에서 쉬곤 했는데, 중구청 주변의 골목에는 항상 기타소리와 음악이 나오는 팔로미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LP음반과 향긋한 커피가 있던 곳! 당시 많은 이들의 힐링 명소였다. 


 “촛불잔치”의 이재성, “미소속에 비친 그대”의 신승훈, 강산애가 부른 ‘넌 할 수 있어“의 작곡가 홍성수 등, 많은 음악인들이 이곳에서 라이브로 노래하고 지하 연습실에서 함께 노래했다.

“ 팔로미노에서 노래하던 사람들 중에서 유명하게 된 사람이 많아요. 이런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서 노래를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많았죠. 대학생들도 참 많이 왔어요. 지금이야 대학생 가수라고해서 특별할 게 없지만 80년대만 해도 대학가요제가 대단했잖아요. 그러니 팔로미노를 찾는 청년들이 많았던 거죠. 1960-70년대 서울의 세시봉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봐도 좋을 거예요”

 여러 가수 지망생이 노래했던 라이브 명소이자, 당시는 드물게 탄노이 스피커가 있던 곳, 그런 팔로미노의 주인이며 컨트리 가수, 그리고 대흥동의 오랜 터줏대감, 그가 바로 이정명이다. 그를 통해 대전에서는 컨트리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고, 내쉬빌이라는 지명 또한 그를 통해 처음 들은 이들이 많았다.

 이광조, 신촌블루스의 엄인호도 90년대 초반까지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뿐만 아니라 이문세, 4월과 5월, 어니언스, 해바라기, 한마음 등의 보컬과 그룹이 지방방송 출연이나 공연을 오면 팔로미노를 들렸다. 팔로미노는 가수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대전시민들이 여러 유명가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자 대중음악을 널리 알린 창구와도 같았다.

지금도 팔로미노에서는 여러 장르의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시를 쓰는 작가들이 담소를 나누고 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시낭송인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간간이 이곳에서 예술세계를 나누고 있다. 1983년 꾸며진 팔로미노가 격랑의 시대적 흐름과 다양한 문화변동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는 원도심 사람들과 함께 30년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컨트리 음악과 내쉬빌
 
 컨트리 음악은 한 마디로 미국 백인들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소울이나 리듬 앤 브루스, 재즈가 흑인들로 부터 시작되었다면, 컨트리 음악은 미국 남동부의 민속 음악이 그 출발점이다. 1930년대 캘리포니아 남부를 중심으로 한 Western Swing과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인기였던 할리우드 서부영화와 함께 발달한 카우보이 음악, 그리고 힐빌리 음악을 통칭해서 “Country & Western”으로 부르다가 나중엔 컨트리로 통일해서 불렀다고 한다.

 

 컨트리의 본고장 하면 미국 테네시주 내쉬빌을 꼽을 수 있는데 1925년에 내쉬빌에서 설립된 무대 “그랜드 올 오프리” 무대가 펼쳐지면서 컨트리 팝, 컨트리 록 등의 컨트리 음악이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국환의 “아리조나 카우보이”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서수남 하청일의 번안곡 “팔도유람” 요들송으로 유명한 김홍철의 노래 등을 컨트리로 꼽을 수 있다. 사실 넓은 의미로 보면 육 칠십년대부터 유행했던 포크송도 컨트리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80년대 국내 컨트리 음악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981년 이정명이라는 젊은 가수가 컨트리 음악의 심장부 미국 내쉬빌의 콘테스트, MCF에서 자신이 만든 노래 “심프슨 부인의 늦사랑(Mrs. Simpson's Late Love)이란 노래로 작곡부문 수상을 한 것이다.

 

 

Mrs. Simpson's late In love 

Mrs.Simpson
I know your vague fever
but summer is just for fall's coming.
everyone in the world has his own life.
your life is walking along with Mr.Simpson.
don't fool around on him.
and for you Mrs. Simson
you should never be a wanton woman.

Mrs.Simpson
why is it one can't love only one?
somethings are hard to understand.
but when you walk alone.

don't you feel lonely and sad.
you could walk in sunshine or snow.
If you keep it to yourself what you have

will die not grow.
you should never be a wanton woman.

I know your vague fever
I know your vague fever
oh, Mrs.Simpson.
but don't be fool.

 


 그는 이 노래 하나로 국내 컨트리계의 대표가수가 되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내쉬빌 작곡가협회” 준회원과 정회원을 거쳐 평생회원이 되었고 지금까지 3집 앨범을 발표 했다. 현재 국내 컨트리 뮤직 계열 뮤지션 중에서 인정받는 싱어 송 라이터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대전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여전히 대흥동을 지키고 있는 팔로미노에서 이정명씨를 만나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다.

“컨트리 음악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구요. 아마도 운명적으로 이 장르가 나한테 오지 않았나 싶어요. 1977년 78년 계속 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내가 주로 하게 되고 잘 하는 게 컨트리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운명이다 이렇게 믿고 본격적으로 해왔던 거죠”

청소년기에 음악을 무척 좋아했던 이정명씨는 대개의 10대 청소년들처럼 팝을 심취해서 들었다.

“남의 나라 음악을 한참 듣다보니까 우리나라 대중 음악도 세계에 역수출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 내쉬빌에 곡을 테이프로 보냈죠. 내쉬빌에 프로덕션이 여러 군데가 있는데 마침 한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모세 주니어’ 라는 분이 내쉬빌 팝 페스티벌이 있으니까 거기 참석해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거기에 가게 되고, 수상을 하게 됐던 거죠. 생각해보면 생면부지의 모세 주니어란 그분이 무척 고맙죠”

내쉬빌이라는 도시도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서 열린 가요제 소식도 많은 이들은 금시초문이었다. 내쉬빌은 테네시 주 중부에 있는 테네시 주의 주도로 미국에서는 컨트리 음악의 도시로 불리고 있다. 한 때는 이 곳에서 미국 음반의 대다수가 만들어졌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한국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라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는 지난 1983년 내슈빌의 명예 시민의 영예를 얻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영부인 이희호 여사는 미국의 대표적인 명문대학인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2002년 '제1회 도덕적 인권지도자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당시 영부인의 수상연설을 상기하는 것으로 내쉬빌이라는 도시의 추억을 잠시 돌아보자.

 
“ 저는 오늘 이곳 테네시주 내쉬빌로 향하면서 지난 유학시절을 회상하며 잠시 깊은 추억에 잠겼습니다. 이 곳은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젊은 날의 자화상이 그려진 곳입니다. 스카릿 칼리지의 학생으로 밴더빌트 대학교의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던 기억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저의 모교였던 스카릿 베넷 센터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번 모교방문은 1958년 졸업 이후, 1968년과 1983년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특히 1983년의 방문 때에는 모교에서 ‘타워 어워드’를 받았고, 또 저의 내외가 내쉬빌의 명예시민권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돌아본 모교는 비록 여러 가지가 변해 있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고, 마음은 마치 고향집에 온 것처럼 편했습니다. 제가 이곳 내쉬빌에 있을 당시 매달 한번 ‘피바디 종교센터’에 이 지역의 한국학생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한국식사를 즐겼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이 도시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쉬빌이 그리 낯선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열린 가요제에서 작곡부문을 수상한 이정명씨는 우리나라 음악계의 화제로 떠올랐고 당시 KBS 9시 뉴스에서도 이 소식을 전했다.

 


이정명이 기억하는 대전의 원도심

 

대전에서 자란 이정명씨는 그 누구보다 원도심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고 했다. 옛 충남도청 앞 삼성생명 건물이 서 잇는 자리에는 소달구지 지나가고, 비만 오면 대전천에 산채로 돼지와 소가 떠내려가던 모습도 아련하다고 했다. 지금의 팔로미노 자리 앞에는 개천이 지나갔는데 지금은 복개가 돼 냇물의 흔적은 추억 속에 남아있는 형편이다.

 

“어머니가 남도창을 하시는 국악인이었는데 당시에 묘향 여관을 운영했었죠. 그때 예술하시는 분들이 여관에 많이 오셨죠. 연정 국악원으로 유명한 연정 선생님도 우리 집에 자주 오셨는데, 오시면 인사 드리고 그랬죠. 묘향여관의 묘향은 어머니 호예요”,

이정명씨가 원도심과 인연을 맺고 음악적 영감을 얻은 것은 어머니가 운영한 묘향여관 덕분이었다. 그 당시 묘향여관에서는 전국의 예술가들이 숙박을 하면서 작품을 만들기도 했었고 밤늦도록 예술가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공간이었다. 즉석에서 마당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예술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정명씨는 자신도 모르게 꿈을 꾼 지도 모른다. 그가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팔로미노를 만든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묘향여관이라는 예술인 교류의 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근데 어머니가 남도창 하시던 분이라 팝을 하겠다는 아들과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처음엔 그냥 그러나보다 하다가 제가 본격적으로 컨추리를 하니까, 어느날 어머니가 컨추리 뮤직 잡지를 다 버렸어요. 어머니가 화를 내시던 건 지금 기억하죠.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자식이 직장도 안다니고 음악을 한다면 인정하기가 쉽겠어요”

지금이야 다 옛날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흔적이 묻어있는 묘향여관과 관련된 것들은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다. 그런데 최근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대전 원도심 지역에 방치돼 있던 작은 주차장이 일반인들이 예술체험을 할 수 있는 갤러리로 변신해 주목을 받고 있다는 뉴스였다. 그 곳은 중구 대흥동 460-1 번지에 위치한 'Park-ing' 갤러리인데, 여기가 바로  전국의 예술인들이 대전을 방문하면 자주 숙박했던 곳으로 유명한 '옛 묘향여관' 건물 1층이다. 이곳을 지역의 대표적인 화가인 박석신 화백이 갤러리로 꾸며 예술의 향기를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묘향여관 자리는 여러 사람에게 예술의 혼을 전해주는 명당임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전을 컨트리 명소로

 

“지방마다 그 지역의 문화가 있고 특성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뮌헨은 판화가 세계 최고이고 . 부산하면 영화가 떠오르잖아요. 요즘 지방자치단체에서 이것 저것 사업을 많이 하는데, 물론 많이 하면 좋긴 하죠. 하지만 자신있게 내세울 메인 한 가지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대전은 컨트리 음악도시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컨트리 음악인으로 당연한 바람인지 모른다. 컨트리 음악 환경이 얼마나 조성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도시에만 있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갈망은 대단했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 손님들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진로집에 갑니다 1964년 생긴 진로집은 두부두루치기로 유명하잖아요. 대전의 향토 음식이라고 불러도 지나치고 않죠. 이렇게 상징적인 것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재즈는 뉴올리언스로 유명하고 또 멤피스는 R&B로 알려져 있잖아요. 이렇게 대전을 컨트리 음악도시로 만들고 싶은 게 꿈입니다. 대전에 미국 내쉬빌의 유명 공연장인 ‘그랜드 올 오프리’와 같은 공간을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지금도 외국친구들에게 대전을 내쉬빌이라는 지명을 따 와  대전빌이라고 소개를 할 때가 있어요”
 
이런 음악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인프라도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꾸준하게 공연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정명씨는 충무체육관이나 지금은 사라진 시민회관에서 이뤄진 수많은 공연을 의미있게 생각한다. 관객이 얼마 오는지 연연해 하지 말고 꾸준하게 공연을 열어야 음악도시의 환경을 갖춰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로미노 같은 공간이외에서 자체공연이 많이 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영원한 컨트리 정신, 팔로미노

 

팔로미노는 말의 색깔에 따른 유형을 뜻하는 단어다. 털색이 크림색·노란색·금색이고 갈기와 꼬리가 흰색이나 은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1941년 생긴 미국 팔로미노 말 사육자 협회와 1936년에 생긴 팔로미노 말 협회에서 팔로미노를 등록하고 있다.

그의 사진 중에서 유독 카우보이 모자를 찍은 사진이 많은 것을 보면서 팔로미노라는 말을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카페 이름을 팔로미노로 정한 것은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는 컨트리 음악클럽들이 팔로미노라는 이름을 즐겨 쓰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나라 컨트리 음악의 산실이자 메카로 만들고 싶어 팔로미노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열었던 것이다.

 

2013년, 팔로미노가 30년을 맞았다. 창업 30년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고, 컨트리 음악 보급 30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팔로미노. 그의 카페에서 30년 역사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래된 레코드 판은 여전히 아날로그의 감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30년 전 쓰던 탁자는 몇 개는 지금도 남아있다.

“ 외지에서 대전에 오는 가수들은 지금도 팔로미노 와서 담소 나누고 가고 그래요. 일종의 아지트 커피숍이라고 할 수 있죠. 30년 된 테이블이 많은 분들의 향수를 자극하지 않나 싶어요. 일종의 노스탤지어라고나 할까요”

198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팔로미노. 30년 역사를 원도심과 함게 해왔다. 그 역사를 만들어낸 이가 바로 영원한 청춘 컨트리 음악인 이정명이다.


그의 노래 “가버린 사랑”처럼 사랑은 떠나지만 청년같은 푸른 소나무의 정기는 우리의 마음 속에 스며 있다.

창가에 심은 푸른 소나무처럼
우리 사랑도 늘 푸르렀는데
물거품처럼 사라진 우리들 약속
당신과 함께 영원히 떠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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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2013.11.21 16:48

백년된 집 같은 극단을 만들고 싶어요 - 나무시어터 연극협동조합

나무같은 극단, 풀잎같은 배우

나무시어터는 2010년 5월1일 대전에서 창단한 극단이다. 텔레비전과 영화, 그리고 게임 등 영상문화가 빠르게 발달하고 있는 가운데, 당시 극단 창단 소식은 하나의 신선한 도전이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의 회귀였지만 연극이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빛나는 아날로그의 부활이었다. 

 


 
지역에서 15년 이상 활발한 공연작업과  다양한 사회문화예술 활동을 해온 문화예술인 10명이 뜻을 모아 모였다. 그들은 연극예술을 토대로 예술의 자양분과 무대의 호흡,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기 위해 뜻을 함께 했다. 나누는 연극, 함께하는 연극,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연극, 그래서 모두가 공유하는 연극공동체를 만들기로 결의를 다졌다.

(儺) 푸닥거리
  (舞) 춤출
    (詩) 시
      (語) 말
         (攄) 펼치다

나무는 삼국시대의 무극을 가리키는 말이고 시어터(Theatre)는 연극,극장, 관객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무시어터는 이런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 나무는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나무가 되기도 하고, 이육사의 시 <교목>이 되기도 한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 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지역 연극판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선후배들이 모여 극단을 만든 만큼 바람도 흔들지 못하는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싶었던 연극쟁이들. 그들은 연극공동체의 뜻을 모아 극단을 창단하였고 더불어 함께하는 작업을 극단 운영의 중요한 방향으로 삼았다.
 대전에는 극단이 열다섯개 가량 된다. 이 가운데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극단은 여덟 게 남짓. 그 가운데 나무시어터는 다른 극단과 달리 막내 단원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어서 젊은 열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젊은 단원이 많다는 것은 열정과 도전의식을 가진 식구들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젊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에너지이자 동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여기 저기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공연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 다른 극단과 차별화되는 점이 무대 밖 예술작업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나눔 공연에도 자주 참여하는 편이다. 지역의 음악 미술 전문가들이 극작업에 참여를 하듯이 이들 또한 지역축제와 소규모 행사에 무료로 참여하는 품앗이 작업을 자주하고 있다. 극단 창단시 꿈꾸었던 연극공동체를 현장 작업을 통해 구현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이들의 지향인 것이다.


대전연극, 도약의 중심에 서다

 현재 대전의 극단들은 도약을 거듭하고 있다 . 불과 5년 전과 비교해봐도 연극판이 풍성해졌다는 게 지역 연극계의 중론이다. 각 극단마다 내부역량을 강화한 것이 주요했지만 대전시에서 소극장 지원사업을 펼친 것도 많은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뿐만 아니라 극단들이 소극장을 마련하면서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횟수가 늘어났고, 한달간의 장기공연을 시도하는 극단들도 늘어나고 있는 점도 도약의 발판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무시어터가 창단 작품으로 올린 < 뱃놀이 가잔다>의 장기공연은 지역 연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뱃놀이 가잔다>를 무대에 올린 시간만해도 석달 남짓, 장기공연은 극단의 힘이기도 하지만 극단운영의 역량을 키워가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대흥동에는 소극장들이 모여 있다. 시에서 원도심 활성화 사업을 하는 것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겠지만 대전 문화예술의 근거지가 대흥동과 은행동이라는 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사실 둔산 지역이 들어서기 전만해도 대흥동 은행동 선화동에는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작업공간이 있었고 문화예술 담론을 가지고 열정어린 토론을 벌이기도 한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예술에 대한 지난날의 향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대전의 원도심을 찾아 예술의 향기에 젖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연극인과 문화예술인들이 중심으로 펼친 <대흥동립만세>같은 문화예술이벤트도 원도심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예술인들을 결집시킨 동력이 되었고 시민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원도심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산호여인숙같은 게스트하우스나 공감만세같은 여행사가 원도심기행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도 문화예술의 뿌리를 강하게 만든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무엇보다 원도심내에서 소규모 행사들이 많이 생겨나고 그것이 단순히 보여지는 모습에 끝나지 않고 시민들이 참여하고 즐기게 됐다는 점이 원도심 문화예술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고 그 중심에 나무시어터가 있었다.

 

누구나 즐겁고 싶지 않나요, 펀(fun)짓거리
그런 점에서 지난 6월에 나무시어터가 펼친 <펀짓거리>는 극단 운영의 방향과도 상당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단원들끼리 뭐 재미있는 거 없을까, 흔히 말하는 뻘짓거리 한번 해볼까 하다가 펀(fun)짓거리를 펼치게 된 것이다. 골목이나 작은 공원에서 한바탕 난장을 펼친다는 생각으로 즐겼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펀짓거리 공연은 모든 장소가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명을 받아가면서 조용한 무대위에서 연극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작은 골목에서도 얼마든지 연극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무시어터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좋은 작업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치단체에서 하는 교육 연극프로그램에 참여한 경우도 극단의 활동영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면 주민참여예산제를 실시하는 유성구에 가서 주민들이 이 제도를 잘 알 수 있도록 주민참여예산제를 주제로 연극행위를 한 것은 연극을 통해 얼마든지 소통하고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를 꿈꾸며 오늘도 대전연극의 한 중심에 서 있는 극단 나무시어터. 그들은 무대 위와 무대 밖의 연극을 고민하면서 오늘도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단원들이 예술강사로 참여하고 문화예술행사를 기획하고 다른 예술작업에 왕성하게 참여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연극인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무시어터도 넘어서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인 문제, 아마도 연극인생 마지막까지 숙제일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현재는 극장이 없다보니까 공연을 준비하는 어려움도 적지 않다. 또한 젊은 예술인들의 수급이 원만하게 이뤄내는 것도 극단이 풀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줄탁동기의 정신, 연극협동조합, 마을기업으로 변신

지난 6월, 나무시어터는 또 다시 의미있는 조직운영의 실험을 단행했다. 협동조합으로 변신을 위해 창립총회를 가진 것이다. 협동조합은 사회적 경제의 중요한 대안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연극협동조합으로 조직구성을 변화시킨 나무시어터는 지난 9월  마을기업으로 지정됐다. 협동조합 활동을 오랫동안 해온 김기섭씨 같은 전문가는 ‘안팎에서의 줄탁동기없이 협동조합은 시대적 소명을 다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줄탁동기는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새끼와 어미닭이 서로 안팎에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극단이 연극협동조합으로 변신한것은 서로 의지하고 힘을 합치는 공동체 문화를 향한 실천적 움직임이라고 보기에 충분했다.

 

 전문극단이 협동조합으로 성격을 달리한 것도 눈에 띠었지만, 마을기업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은 또 다른 화제였다. 마을기업은 지역 사람들을 하나로 모이게 한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경제적인 관점이 녹아있다. 나무시어터가 빠른 속도로 극단의 성격과 위상을 새롭게 다져나갈 수 있는 것은, 연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이자 예술 경쟁력을 갖기 위한 진지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성용수 사무국장이 들려주는 연극이야기

취재를 위해 찾아간 극단 사무실 건물의 1층에는 “ 수상한 부엌”이라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배고픈 이들이 배우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밥은 먹고 사나,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 이는 성용수씨다. 극단의 살림을 맡고 있는 사무국장 성용수씨에게 연극을 언제 시작했는지 물었다.

“고교 졸업하고 95년 때부터 시작했는데 여러 가지 삶을 살아보고 싶더라구요
 노숙자 과학자 사장 모든 꿈들 이룰 수 있는 게 연극배우 아닌가요 ?”

성용수씨는 배우의 삶을 통해 세상 전체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게 좋아 연극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15년 남짓, 다양한 배역을 통해 타인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 배우는 공유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매력만점이다

“연극을 할 때마다 매번 나름의 만족도가 높아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다른 삶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는 점이 좋구요. 배우가 카멜레온적인 점에서 흥미가 배가 됩니다. 결국 그게 삶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의 깨우침을 무대 위에서 배우고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먼저 인생을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내 작업을 보면서 깨우치는 관객도 있기 때문에 나와 관객은 다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한 몸인지도 모른다.

“올해 아이가 태어나는데 고민이 많아지네요. 그것 또한 변화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작업을 하는 건 연극이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고생이 시작될지 모른다. 아이가 태어난 뒤의 인생이란 또 다른 무게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배우로서의 삶도 빛나지만 극단을 더욱 알차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시선을 가져야 할 필요성도 느꼈다는 성용수씨.
 
“축제 기획이나 문화예술기획 등에 애착이 있어요 공연은 당연히 해야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이외에 페스티벌이나 다양한 장르의 문화가 접목된 부분에 재미가 있어요. 사실 연극이 종합예술인데 다양한 체험 만나고 그런 일 하고 싶네요”

원도심 활성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한 <뻔짓거리>를 기획하고 참여한 것도 결국은 기획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장르의 다양한 시도가 이뤄질 때 극단도 발전하고 지역 연극판도 커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 연극에서 배우는 꽃이고 무대공연이 시작되면 연출이나 스탭은 의미가 반감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모든 스탭이 중요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배우가 만들어가기 때문에 극에 어울리게 잘 놀면 되지 않을까싶어요. 어릴 적에는 어떻게 하면 멋있을까 ? 이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무대에서의 역할의 삶을 얼마나 살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대흥동에 소극장이 많이 들어서는 건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런 소극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더욱 치밀해져야 한다. 참신하고 탁월한 기획, 그러면서 대중성을 얻는 공연, 언제 어떻게 그런 연극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극장을 열어두면 많은 아이디어가 솟아날 것을 믿는다.

 

 

“공연이 계속 펼쳐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체 기획력이 중요해요. 왜냐면 극단이 6개월 이상 돌아가는 극단이 없는게 현실입니다. 그것은 자체 기획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소극장이 연극을 위한 공간이지만 다양하게 열어둘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나무시어터의 전망을 물었다. 그는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로 해석했다.

“ 뱃놀이가잔다를 석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극단이 허름하지만 백년간 극단이야. 이런 소릴 듣고 싶어요. 나무시어터가 살아갈 수 있는 자생력은 끈끈한 결합, 융통성. 창작열의인데 그 어느 것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또 나무시어터에 남아있는 사람이든  거쳐 간 사람들이든 극단이 영원한 집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무시어터가 연극협동조합으로, 마을기업으로 변신한 새로운 실험이 백년 역사로 이어질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은 세익스피어의 연극이 지금도 재해석되고 새롭게 무대에 올려지는 것처럼, 좋은 연극을 만드는 매순간이 모여 백년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배우와 관객은 줄탁동기의 관계다. 안팎에서 알을 깨는 동안 대전연극은 더욱 풍성해질테고 연극인들은 무대에서 다양한 인생의 드라마를 보여줄 것이다. 연극을 인생에 비유하는 건 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과 조연이 우리 스스로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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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2013.11.14 11:18

인장공예의 명장 류철규 씨가 둥지를 틀고 있는 선화동 ‘성호사’를 찾다.

작은 공간에 우주를 새기는 명장

 

 명장(明匠)은 한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과 품격을 가진 사람에게 국가가 인정하는 자격이다. 한 사람에게 명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는 엄격한 과정을 거친다. 물론 한 분야에서 이룬 기능과 결과물을 중요하게 보고 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시대의 명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적으로 이룬 인성과 사회에 기여도 등, 기능과 그것을 이룬 환경 전체를 종합적으로 심사한다. 이렇게 소관 부처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정부가 결정한 다음,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의 명장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인장공예 분야에서 3호 명장인 류철규 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을 제외한 8도에 유일한 명장이었다. 여기에 류 명장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명장이라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인장(印章)공예 분야의 명장은 현재도 10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개 고령인 분들이 많다. 현재는 정부가 실시하는 명장 심사에 참가하고 있는 류 명장의 말에 따르면 명장의 자격을 딴 사람들, 또 도전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류 명장보다 나이가 많다고 한다. 올해 환갑인 류 명장이 이미 10년 전, 명장에 도전해 꿈을 이룬 것을 고려할 때 젊은 날부터 그가 얼마나 인장에 정진해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류 명장은 인장에 대해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인장은 단순히 문서에 자신을 표시하는 붉은 표시만이 아니었다. 아름답게 새겨진 인장은 귀한 소장품일 뿐 아니라 주인의 운명과 연결된 혼을 가진 예술품이자 행운으로 이끄는 상징이라고 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인장을 권력이나 신분을 상징하는 신표로 여겼으며 지닌 사람의 품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예술품으로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류 명장은 그래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인장을 새기는 작업은 작은 공간에 각(刻)과 서(書)를 조화롭게 운용해 우주를 새기는 작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옛말 하나 옮기지요. ‘크도다 마음이여 만령의 곶집이요. 묘하도다 인장(印章)이여, 교역의 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인(印)의 조화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름만큼이나 인장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기능에서 예술의 길을 찾다

 류 명장이 인장 분야에서 처음 투신한 때는 43년 전이다. 천안 병천에서 나고 자란 류 명장은 고등학교 1학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장남인 그에게 가정을 돌봐야할 책임이 돌아왔다. 그때 손재주가 좋고 또 좋은 필체를 가진 그를 지켜본 동네 어르신은 인장 일을 추천했다.
 “모두 도장이라고 하죠. 당시만 해도 도장업소가 호황을 누렸어요. 일도 많았고 열심히 하면 인정받을 수 있었죠. 잘만하면 일반 공무원보다 수입이 나았으니까요.”

 그는 무작정 대전으로 터전을 옮겨 인장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스승인 이석성 선생의 문하였다. 도제식으로 일을 전수받던 당시의 기술 문화에서, 문하라고는 하지만 배우는 이들에게 월급 같은 것은 없었다. 먹는 일과 잠자는 곳만 해결하면서 잔심부름부터 시작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꼬박 10년을 배웠다고 한다.
 “옛날 분들은 누군가 이 일을 끈기 있게 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데 3년을 두고 지켜봤어요. 3년이 지나니까 하나씩 가르쳐주기 시작하더군요.”

 낮에는 잡일을 도맡아하고 밤이 되어서야 자리에 앉아 스승이 조각한 것을 그대로 흉내 내기 시작했다. 잠은 하루에 3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친 과정이 지금 류 명장의 초석이 된 것이다.
 “7~8년 지나니까 슬슬 기술자 소리를 듣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때 스승이 말하더군요. 앞으로 술 같은 것은 되도록 자제하고 서예와 한학을 공부하라고 지긋이 일러주셨죠. 그래야 기술자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말씀이었죠.”

 

 

 류 명장은 그 말을 새기고 한학과 역학, 서예, 돌이나 금옥 등에 글과 그림을 새기는 전각, 나무판에 글씨를 새기는 서각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서예에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이렇게 오체가 있다. 이런 체들을 익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인장에서는 오체를 쓰되 거꾸로 뒤집어 써야 한다. 여기에 붓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작은 공간에 바로 이 글씨들을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다. 인장의 과정은 이렇게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인고의 과정이기도 했다. 젊은 날 쏟아 부었던 이런 노력이 인장을 단순한 기능에서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스승의 노력은 그뿐 아닙니다. 이석성 선생은 10년이 지나자 그분의 스승에게 다시 저를 보내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그쯤 되면 제자를 데리고 있으면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류 명장은 그때까지 배우고 익힌 기능과 정신을 다시 수련하기에 이른다. 스승 스스로 청출어람을 인정하고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기를 바랄만큼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에 힘입은바 크다는 것이다. 대전에 계셨지만 고 박인규 선생과 이석성 선생은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전국 어디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스승의 풍을 잘 받아들인 류 명장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 스승들의 철학과 글꼴을 제대로 전수받는다. 

 

 

원도심을 텃밭으로

 류 명장이 원도심에서 ‘성호사’를 운영한 지도 43년이 되었다. 옛 충남도청 건너편에 위치한 선화동 지금의 자리에서만도 33년이 지났다. 원도심의 산증인이기도 한 류 명장은, 그에 맞게 현재 선화동 번영회의 회장 역할도 하고 있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류철규 씨는 대전시 새마을지도자로 12년을 생활했다. 살고 있는 지역에도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이 일이 명장으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일의 특성상 하루 종일 좁은 공간 안에 갇혀서 지냈다. 여러 공부를 했지만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지역과, 사람과 교류를 가지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그리고 그때 이 업계에 들어온 이상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겠다는 목표를 새롭게 가졌다. 이후로 10여 년 다듬고 다듬어 명장에 도전했고 목표를 이루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원도심이 상당한 침체기를 맞고 있지만 80~90년대, 성황을 이루었던 시절에는 돈을 많이 번 집들도 많았죠. 성호사만해도 저에게 인장을 맡기면 한 달씩 기다리는 일은 예사였습니다.”
 선화동은 관공서가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시청, 충남도청, 법원, 경찰청 등, 지금은 이전했거나 이전할 기관들이 모두 위치해있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류 명장의 성호사도 주로 관의 일을 많이 맡았다.

 “관의 일이라는 게 아무한테 막 맡기는 일이 아니지요. 관인이라는 것은 그 단체의 얼굴이기 때문에 더욱 함부로 새길 수 없는 거니까요. 도지사, 시장, 법원장, 정치인, 국회의장, 등 많은 사람들의 인장이 내 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업소가 사라졌다. 대흥동에 비하면 선화동은 더욱 사람의 발길이 줄었다. 시청, 도청 등 거의 모든 관공서가 옮겨갔기 때문이다. 성호사의 일도 1/3 정도로 줄었지만 류 명장은 지금도 즐겁게 인장을 새기고 있다.

 

류철규 명장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

 류 명장의 작업이 더욱 가치 있는 원인 중에 하나는 그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오랜 공부의 결과물이었다. 그가 개발한 서체는 서예의 소전체와 인장에 사용하는 전서체를 결합해서 만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새로운 것이었다. 또한 이 서체는 모두 정통 서예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지 못하는 정통성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한다.
 류 명장의 인장에는 그 서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장의 옆면에는 반드시 류 명장의 시호가 새겨져 있으며 명장의 작업임을 증명하는 증서가 함께 포함되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류 명장의 작업 또한 남과 다른 면이 많다. 그는 일단 오전 작업밖에는 하지 않는다. 2003년에 명장이 된 이후로 작업은 오전으로 제한하고 있다. 육체와 정신의 모든 공력을 집중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오전 동안 많게는 2개의 인장을 새기고 나면 전력을 소진한다고 한다.
 “내가 스스로 몸 관리를 하지 않으면 인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복인(福印)을 만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선명한 시력, 건강한 정신과 육체 없이는 좋은 인장이 탄생하지 않죠. 한 분 한 분 제게는 모두 소중하니까 절대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인장이 가진 아름다움을 차별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그는 가장 먼저 108배를 하고 다음으로 정성들여 목욕재계한다. 이렇게 가장 맑은 정신으로 자리에 앉아 새로 태어날 인장을 잡는다. 그를 찾는 사람은 인장의 소중함을 알고 오는 것이기에 그에 걸맞게 정성을 가지고 깊게 소통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재료도 사용하는 사람의 성격과 인장의 격을 맞추기 위해 비싸지만 국내산만을 고집하고 있다. 정성을 다한 인장인 만큼 그것을 소중하게 사용하면 그것이 복인이라는 것이다.
 “오후에는 주문을 받거나 후진을 양성하는 일을 합니다. 요즘은 바로 앞에 있는 대전시민대학에서 전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열 명 정도 수강하는데, 물론 몇 십 년을 해도 시원치 않은 공부이지만 배우고자하는 분들을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 자리는 빠지지 않아요.”

 우주의 조화를 새기다
 


 많은 사람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있다. 같은 이름이라도 류 명장의 손을 거치면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류 명장의 독특한 서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장을 만들러 사람이 오면 먼저 사주를 봐 그 사람의 성격 체질에 맞게 이름을 새긴다. 성격이 아주 강한 사람은 글꼴을 부드럽게 새기고, 여성스러운 사람은 강한 서체를 사용한다. 그러면 그 나름대로 강약을 상쇄해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또 아주 좋은 이름은 이름 석 자만 새기지만 좋지 않은 이름의 경우, 이름과 함께 印이나 信, 章을 함께 새겨 좋지 않은 기운을 누르는 효과로 액운을 막는다. 류 명장은 인장 하나의 격을 맞추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공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보람도 많다. 정성스럽게 새긴 류 명장의 인장을 사용하고는 좋은 일이 생겼다고 찾아오거나 연락을 해올 때이다.
 “40여 년을 팠으니까, 참 많이도 팠죠. 인장만으로도 경부고속도로를 몇 번 왕복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하루에 한 개를 파더라도 아주 즐겁게 일합니다. 공부도 하면서요.”

 류 명장은 요즘 주로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그중 몇을 소개해본다. 먼저 수결이다. 수결은 나무뿌리로 만든 일종의 집안 공통 사인(sign)이다. 류 명장이 복원한 수결은 우암 송시열 일가의 수결이다. 일견 자유분방한 모양과 서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만의 예술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음이 눈에 띈다. 또 하나는 와당문자이다. 기와집의 처마 끝과 용마루에 새겨진 문양을 전각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 천부경과 같은 문장을 예술적 조형물 위에 전각으로 살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작업은 이미 단순한 기능의 차원이 아니라 뛰어난 예술품으로 역사적인 가치까지 담으며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인장으로 출발해 서예와 전각, 서각, 달마도와 같은 그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단계 높은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류 명장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멀지 않은 새로운 희망

 2013년 9월, 류 명장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물론 과거에 국무총리 표창도 있었으며 장관 표창도 3회에 이른다. 그러나 영광으로 따지면 많은 사람들이 류 명장의 인장으로 감동을 얻고 즐거운 일을 맞이했다는 것이 더욱 큰 것이었다. 물론 인간으로 겪어야하는 생의 부침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 마음을 비우고 즐겁게 일을 하는 류 명장은 나지막한 꿈 하나를 얘기했다. 바로 인장박물관이다.

 “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소박하게 인장박물관을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장의 세계를 알리고 싶어요.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부터 지금의 새로운 인장까지, 또 아주 전통적인 것부터 지금 우리 생활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 단출한 인장에서 깊은 예술성을 가진 것, 모두를 모아 많은 사람들에게 인장의 세계를 알리고 싶습니다.”
 그 희망은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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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2013.11.14 10:12

행복해지는 힘을 기르는 대전시민대학에서 다시 희망을 찾다

 
개강을 앞둔 대전시민대학의 밑그림

 처음 대전시민대학을 찾은 건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6월의 마지막 금요일 오후였다. 충남도청 이전으로 원도심의 구심점이 사라졌다는 우려를 새로운 기회로 변화시킨 이곳은 불볕더위에도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청 내부는 여기저기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시민대학의 본부가 위치한 장암관 3층 또한 공사의 소음과 함께 개강을 앞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사무실은 7월 8일 개강을 앞두고 직접 수강신청을 하기위해 찾아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아직 홍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음에도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시민대학 강좌에 관한 문의가 줄을 잇는다고 당시 담당자는 전했다.

 무엇이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시민들의 폭 넓은 관심을 끌게 한 것인지 궁금했다. 이미 곳곳에 문화센터나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교육프로그램이 넘치는 상황에서 대전시민대학이 시민의 관심을 잘 끌어내 원도심을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으로, 또 대전이 문화예술도시로 발돋움하는데 큰 계기로서 과연 온전히 자리매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없지 않았다. 소규모의 문화센터 프로그램 정도만 떠올리며 연상해보기엔 옛 충남도청 자리는 그 규모가 워낙 큰 공간이라 어떤 모습의 시민대학이 될지 잘 그려지지 않았고, 규모에 걸맞은 내실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먼저 홈페이지를 찾아 프로그램 강좌 명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공공기관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혹시 들을 만한 강좌 없을까 찾아보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강좌를 찾기 어려워 강좌 신청을 망설였던 경험이 많았기에 프로그램 강좌를 살피는 일은 시민대학의 면모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잣대이다. 그러나 그 잣대는 적잖이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하루 아침에 탁상 행정으로 만들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동안 외부에서 접하지 못한 아주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즐비했고 개인적으로도 듣고 싶은 강좌가 많았다.
 


 우선 총 11개 분야의 아카데미와 다섯 개의 클래스로 1000여 개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강좌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역사 문학 철학 심리 등의 다양한 인문 프로그램강좌, 세계 각국의 언어를 두루 접해 볼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언어프로그램강좌, 공연 문화 예술 강좌, 경제, 법률, 과학 분야의 전문 강좌, 생활 취미 오락 강좌에서 시민공동체 강좌 등 다양한 분야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강좌들이 가득했다. 문의 전화가 줄을 잇는다는 담당자의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진정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손

 수요자는 바라고 있지만 그동안 공공기관이 채워주지 못했던 부분을 시민대학은 알고 있었다. 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줄 아는 그런 프로그램을 찾아내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실무진들의 자세와 마음이 느껴졌다.
 충남 도청 자리를 대전 시민들의 평생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발상도 놀랍지만 실제 개강 전 먼저 제공되는 프로그램의 수와 공공기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하고 색다른 강좌 프로그램에 더욱 놀랐다. 과연 누가 이 일을 진행하고 기획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대전시민대학 연규문 학장을 찾아 도청이전을 계기로 이곳에 시민대학이 자리 잡게 된 배경과 취지, 그리고 원장이 그린 시민대학의 밑그림에 대해 들어보았다.

 연규문 원장은 대학시절 경험했던 야학과 오랜 시간 교사생활을 하며 시민교육과 평생학습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유학기간 동안 여러 나라의 살아있는 시민대학의 모습을 실제 체험하며 우리나라에도 정말 절실히 필요한 부분임을 느끼고 그 분야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외국의 경우처럼 평생학습의 장으로 시민대학이 문을 열기를 기대했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선 그 연구를 담아낼 여건이 그동안 조성되지 못했다. 그러다 대전발전연구소에서 교육정책을 담당하게 되었고 대전시가 평생교육진흥원을 설립하자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 일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충남도청 이전에 따른 공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 과정을 지켜보며 바로 이곳이 시민대학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맞춤 공간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판단해 시민대학 설립을 추진했다고 한다.

 “많은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그동안 준비해 온 밑그림이 있었기에 이 일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하며 준비해 온 것, 시민들의 배움에 대한 갈망과 수요, 충남도청 이전에 따른 공간 재활용과 시정의 협조,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면서 이루어 낸 결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일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마음을 따르면서 최선을 다해 일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꿈이 기적처럼 실현되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이어 시민대학의 역사와 의의, 그리고 그가 그린 시민대학의 밑그림을 찬찬히 소개해 가기 시작했다.
 
시민대학의 뿌리

 유럽의 경우 200년 전부터 시민운동이 있었고 시민대학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00년 이상 된다. 독일의 경우, 전국적으로 1만여 개가 넘는 시민대학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이 지역공동체의식을 형성하고 그 힘을 결집시켰던 것이 독일의 부흥을 일으킨 힘이다. 그 뿌리는 국민계몽운동이다. 시대별로 민주주의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하고 실업문제가 대두될 때는 직업훈련에, 때론 시민의 여가를 중심에 두며 변모해왔지만 시민대학의 정신은 결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힘을 기르고 이웃과 더불어 보다 나은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도록 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해방이후 전국에 시민대학 용어를 쓰며 활동해 온 흔적이 있다. 1960년대 이후로 서울, 대전, 부산 등 ·자치단체의 주도로 시민대학을 열고, 시민단체에서 시민의식운동을 해왔지만 유럽의 경우처럼 뿌리 깊게 정착되지 못했다. 농민운동이나 국민계몽운동의 형태로 정착한 시민운동을 관에서 적극 지원하는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시민교육에 대한 정부기관의 인식이 부족했다는 지적이었다.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또한 성숙하지 못했던 요인도 컸다.

 

 

 그러다 정부 기관이 10여 년 전부터 서서히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국 각지에 공공기관에서 강좌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평생학습기관을 두루 다녀보면서 관 주도의 평생학습이 공공성과 다양성을 갖추지 못한 채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을 의례적으로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것은 오히려 평생학습을 왜곡시킬 수 있는 우려를 낳았다.

 평생학습이 노인대학이나 주부들의 가벼운 취미활동으로만 인식 되는 현상, 또는 시민들의 실질적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자격증만 양산하는 기관처럼 인식되고 있는 점은 큰 문제였다. 마치 전국에 축제열풍이 불자 지자체가 무조건 비슷비슷한 내용의 축제를 여기저기서 따라하는 바람에 진정한 의미를 지닌 축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처럼  평생학습이 진정한 의미의 시민교육의 장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렇게 된 원인은 왜 평생학습이 필요한지, 평생학습에 담아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 평생학습이 주민의 삶의 질을 어떻게 변화해 가야할지, 평생학습과 시민의식을 함께 연계하여 그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그것을 이뤄낼 방법들을 찾는 일에 관이 소홀했기 때문이다.

 

시민의식이 성장하는 터

 연 학장은 외국에서 피부로 느끼고 경험한 다양한 연구사례를 통해 살아있는 시민대학의 모습을 바로 이곳 대전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진정으로 모든 시민에게 열려있는 시민대학, 배움을 통해 스스로 행복해지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시민대학, 더불어 이곳을 통해 이웃과 소통하고 건강한 시민공동체의식을 키우며 시민이 주도하는, 최초의 대전시민대학이 되길 바라고 있다. 이로써 시민대학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는 모델이자 대전 시민이 자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될 공간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독일의 본이 시민대학의 좋은 선례이다. 서독의 수도였던 본은 통일과 함께 공공기관이 베를린으로 이전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당시에 매각하거나 헐어버리려고 했던 공공건물들이 끈질긴 시민들의 청원으로 올해 시민대학으로 문을 열기에 이른다.
 “시민대학을 통해 시민의식이 성장하고 함께 공부한 이웃들이 모여 지역사회를 시민들을 위한 장소로 거듭나게 한 선례라 생각해요. 전 바로 이곳이 그런 미래사회를 만들어갈 시민들이 태동하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시민이란 용어 때문에 민간이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관이 지원을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유럽의 경우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독일의 본의 경우는 시민에게 제공되는 프로그램이 만오천 개다. 우리가 천여 개의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인기 강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필요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일을 진행했다. 모든 시민들이 혜택 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아주 세세하고 작은 단위로 고민했다. 아울러 아직 접근해 본적 없지만 시민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강좌를 새롭고 다양하게 제공하고 싶었다. 시민들의 요구를 맘껏 담아내고 때로는 시민대학이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구심점역할을 하기도 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대전시민대학이 배움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면 기존의 평생학습기관과 복지센터의 강좌들이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총체적 역할을 대전시민대학이 중심이 되어 해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제대로 된 철학을 가지고 본격적인 시민대학 시대에 새로운 분수령을 만들어나간다면 대전 시민들이 대전을 더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는 계기로 이어질 것이다.

 “단순히 강좌를 듣는 공간이 아니라 같은 관심과 생각을 가진 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시민의식을 키워가는 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토는 스스로 행복해지는 힘을 기르는 대학입니다. 대전시민이 자랑할만 한 시민대학으로 성장하겠습니다. 집에 계시는 분들은 즐거운 배움의 장으로 나오세요. 밑그림은 우리가 그렸으니까 참여하셔서 시민들의 공간으로 활짝 꽃피워 주세요.”
 밖에서 볼 땐 화려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그 실체를 보고나면 씁쓸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문득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보물을 발견하고 깊은 내실을 확인하게 될 때 참 행복하다. 대전시민대학이 좋은 결실을 거두리라는 믿음도 거기서 생겨났다.

 

대전 시민대학, 개강 후에 듣는 현장의 목소리

 개강 후, 두 번째로 대전시민대학을 찾은 건 9월 마지막 금요일, 가을로 가는 길목이었다. 대전시민대학은 7월에 개강하여 여름학기를 끝내고 2학기 강좌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공사가 진행 중이던 지난 여름과 달리 이미 자리 잡혀 정돈되고 안정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전 11시경에도 주차 공간을 확보할 수 없어 애를 먹을 정도였다. 넓은 공간이 이미 차로 꽉 차 있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뛰는 수강생들의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띠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나오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벤치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팀들의 모습은 마치 대학 캠퍼스의 풍경을 연상케 했다. 수강생만 만오천 명에 이른다고 하니 하루에 이곳을 찾는 이가 얼마나 될지 상상이 간다. 그만큼 이 원도심에 유동인구가 많아졌다는 얘기다. 대전시민대학이 주변 상권에 주는 시너지효과가 얼마나 클지 굳이 조사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 주변지역을 돌며 조사해보니 시민대학 수강생들이 이 주변지역의 상권이 도청 이전과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반응이다. 단순히 원도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뿐만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으로 대전시민의 자랑거리가 될만 하다는 것이다.

 김미영 팀장을 만나 대전시민대학이 문을 연후 현재까지의 추이를 듣기로 했다. 바쁜 와중에도 예고 없이 찾아간 방문자들에게 시간을 내어 그간의 사정과 현 상황, 미래그림까지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수강 현황은 이러했다. 7~8월 여름학기에 735 강좌와 수강생 8,600명으로 시작했는데 2학기 들어 950여개 강좌와 수강생도 12,300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출석률도 높고 70% 정도가 학기를 이수하고 있다며, 자신이 선택한 과목은 대개 끝까지 이수하고 호응도도 높은 편이라고 했다. 이는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성인강좌이기에 만족도가 낮으면 이수율이 낮다. 그런데 이수율이 70%라는 사실은 바로 만족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수업에 늦어 뛰어다니는 성인들의 모습은 여름과 같았으며 정문부터 주차하기 위해 줄을 선 차들은 또 그 열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몇 번 경험한 사람들은 점차 대중교통을 이용해가는 추세라고 했다.

 수강자의 분야별 참여도에 대해 묻자 인문학프로그램에 대한 관심도가 가장 높았지만 실제  재수강 비율은 생활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과목들이 꾸준히 높아지는 경향이라고 전했다. 그래도 인문학 강좌를 듣고 감동받았다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전언이다.
 언어프로그램은 주로 자신감을 얻었다는 반응이 많았고, 심리 리더십 프로그램에선 자기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들 의견을 나누었다. 생활 취미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재미있게 강좌를 이끌었다. 요리를 배우는 남자 수강생은 요리를 통해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는 반응도 있었다.

 분야별로 나타난 수강생의 느낌이 프로그램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만족한 표정으로 교정을 거니는 수강생들을 볼 때 ‘배움을 통해 스스로 행복해지는 대전시민대학’이라는 애초의 취지가 적잖이 실현되고 있다고 김 팀장은 전했다.

 

시대의 메가트렌드, 교육

 김미영 팀장은 개강 전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몇 개월 만에 만들어온 일들이 너무 엄청난 일이었기에 두렵고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열심이 노력했지만 어떤 현실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에 두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대학이 문을 열고 기대가 현실이 되어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느낄 때, 긴 시간 동안의 고생이 보람으로 돌아와 뿌듯하다고 했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교육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신사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일지 모두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대전시민대학을 운영하는 김미영 팀장은 바로 이런 형태가 아닐지 깨달았다고 한다. 학습자 요구가 숨어있어서 장이 열렸는지, 장을 열어 시민들이 몰렸는지 정확하게 전후 관계를 따져 볼 수는 없지만 이것이 시대적인 메가트랜드인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만 구성원들의 삶에 좀 더 유의미한 교육을 만들어주는 것이 남은 숙제이고, 여기에 형식적인 교육이 아닌 삶의 질을 높여가는 방향으로 할 일이 많다고 했다
 
 대전시민대학은 앞으로 프로그램 개발에 중점을 둘 계획이다. 이는 양적팽창을 넘어 질적 깊이를 만들어내는 방향이며 학습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에서 학습자들에게 새로운 요구를 끌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금 학습자가 원하는 강좌를 만들어내는 일을 기본으로 학습자들 자신도 모르고 있지만 가능성이 많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 무엇인지 깨닫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제 과제는 프로그램 개발자의 안목이다. 강사에 의존하지 않고 폭넓은 강좌 기획과 함께 적극적으로 강사를 발굴해내는 일도 시민대학의 몫이다.

 

 

 

늘 열려있는 귀 
 또한 비록 소수일지라도 배우고자 하는 시민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그 분야의 유능한 강사와 만날 수 있도록 멘토링 제도를 활성화 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습동아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가기 위해 현재 학습동아리를 모집하고 있다. 이는 강좌가 끝나더라도 학습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취지이다. 또 소수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이며, 시민대학을 축으로 하는 연대로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대전시민대학은 소수의 의미 있는 이야기에 늘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다짐도 덧붙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로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교육서비스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는 수강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시민대학을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전시민대학은 이제 겨우 첫 단추를 끼웠다. 물론 부족한 점도 많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다. 그간의 노력이 꽃피운 아름다운 반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의 ‘학이’편 첫 구절이 모두의 가슴에 머물고 있는 오후였다. 배우고 싶다면 대전시민대학에 가서 말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조급하지 않게, 조금 천천히 기다려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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