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밥 기획 특집 2015.10.14 14:08

내 인생의 책과 함께하는 멋대로 낭독회

 

멋대로 낭독회 참가신청서.hwp

<내 인생의 책과 함께하는 멋대로 낭독회>

 

일시 : 2015년 11월 14일(토) 오후4시

장소 : 계룡도서관

 

※위 참가신청서다운받아 작성 후 참가신청하시면 됩니다.

   - 신청서 접수처 및 이메일 문의 : storybob@hanmail.net 

    - 전화문의 : 019 -9175-3020  (혹시 010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 019가 맞습니다)

        

※ <멋대로 낭독회> 참여하는 방법

  1. 내 인생에서 중요한 책이나 참가자가 좋아하는 책을 골라서 읽고 싶은 부분을 정한다 (분량 5분 내외)

      - 장르는 시 소설 수필 희곡 시나리오 등 자유

  2. 가족끼리 친구끼리 2명 이상이 모여 어떻게 낭독할지 방법을 연구한다

     ( 멋지게 읽어도 좋고, 음악으로 만들어도 좋고, 랩으로 해도, 연극처럼 해도, 동영상을 만들어도..

     듣고 보도 못한 방법이어도 관계가 없습니다. 참신한 발상을 기대합니다)

  3. 참가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할 때, 맛보기 영상이나 사진, 이렇게 낭독 하겠다는 기획서를 같이 첨부한다

    (낭독 형식의 기획의도를 알 수 있는 자료면 됩니다. 형식과 분량은 자유-동영상, 사진, 한글파일 등)

  4. 예심을 통과한 분들은 11월 14일 계룡도서관 무대에서 관객들이 보고 듣는 가운데 낭독한다

     - 2015년 11월 6일까지 신청서 접수 마감입니다

     - 예심통과자는 15팀 내외로 합니다

     - 참가자격은 계룡시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

  5. 낭독회 입상자들에게는 10만원에서 30만원까지 책과 관련한 상품을 받는다.

    * 세부 프로그램은 추후에 공개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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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밥 기획 특집 2013.11.26 14:11

[대전 원도심 특별기획] 책은 낡았지만 사유의 정신은 푸르다 - 원동 헌책방거리

과거의 역사가 스며있는 책방

 

누군가의 손이 한번쯤 거친 책들이 모이는 곳, 바로 헌책방이다. 헌책방 개념으로 보면 책은 헌책과 새책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대전 원동에 모여있는 헌책방에는 손때 묻은 책들이 꽂혀 있거나 쌓여있다. 신중앙시장 주차타워 앞에는 명맥을 잇고 있는 헌책방들이 모여 있다. 오십년 가까이 서점을 하는 주인부터 2년 전 매물로 나온 책방을 인수한 사람까지, 책을 좋아하는 몇몇이 대전의 헌책방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970년대 중반, 대전에는 35개 가량의 헌책방이 있을 만큼 전성기였다. 중앙시장에 헌책방이 가장 많이 모여 있을 때는 12개까지 성업을 했다. 지금은 예닐곱 개에 불과하다. 정확한 수치를 말할 수 없는 것은 문을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하는 책방이 있기 때문이다.

원동 한복거리 옆에 자리한 헌책방을 찾은 때는 가을이 뒷모습을 보이고 있던 계절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거리에서 책을 정리하는 책방 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원동 사거리 큰 길 옆에 자리한 욱일서점에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두런 두런 얘기를 건네는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점 한켠에서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4 년 전, 욱일서점을 인수한 조방현씨는 사회과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주인이다. 책꽂이에 는 1980년대 대학생들이 즐겨보거나 숨어서 보던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강좌철학 · 해방전후사의 인식 · 세계철학사 ·인간의 역사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연구 ·한국사회의 재인식 · 통일전선과 민주혁명 · 한국노동운동론 등이 눈에 들어왔다.

1980년대 군부정권에 저항하던 수많은 청년들이 이런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다. 공식적으로 판매가 되는 책들도 있었지만, 판금조치가 이뤄져 일반서점에서 구하기 힘든 책들은 복사본을 통해 돌려 읽기도 했다. 쉽게 볼 수 없는 책을 본다는 점에서 긴장과 스릴의 책읽기를 즐겼던 시기가 1980년대다. 사회과학서적을 읽으며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은 486세대라 불리며 이 시대의 중심축이 되었다.

욱일서점 주인이 사회과학과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을 열자 주인이 작은 가방에서 책 몇 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쉽게 보기 힘든 책들이었다. 문교부 주최의 군사혁명예술축전에서 불린 교성곡 자료가 눈에 띠었다.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김동진이 작곡한 교성곡 “승리의 길” 악보였다. 악보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1961.6.19.라는 볼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마도 이날 교성곡이 불려졌던 모양이었다. 악보를 펼치니 “산 옆 외따른 골짝이에 혼자 누워 있는”으로 시작한 첫 구절이 음표와 함께 적혀 있었다.

욱일서점에서는 격변의 시기에 나온 자료들을 적잖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주인은 경복궁에서 열린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출품목록이라는 팜플릿도 소장하고 있었다. 행사가 열린 기간은 1962년 4월 20일부터 6월5일까지였다. 그리고 4.19 혁명 즈음에 만든 소식지도  흥미로웠다. 자료집의 맨 뒤에 쓰여있는 배부처가 어느 다방이라고 표기된 점이 이색적이었다. 아마도 공개적인 출판사에서 작업하기가 곤란해 다방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업을 한 것으로 짐작됐다.

이 집에서 발견한 책 중에 하나인 “미제침략사”.  이 책을 보고 있으니 오랫동안 시선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이 책은 대전 정동에 사무실을 둔 남녘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 중에 하나였다. 이 책을 펴낸 조성일씨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다. 대전에서 출판된 책이 필화사건에 연루돼 당시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조방현씨는 지금은 철거된 홍명상가에서 홍명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한 전력이 있다. 그러다보니 헌책방을 인수한 것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서점 안에는 과거의 역사와 갓 나온 요즘 책까지 혼재되어 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착각이 들었다.

 


헌책방의 산증인, 고려당

1980년대를 추억하며 길 모퉁이를 돌자, 사람 키보다 훨씬 높게 책을 쌓아놓은 고려당 책방을 만날 수 있었다. 올해 78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장세철 주인은 목소리가 또렷했다. 어느새 50년 가까이 헌책방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

 “56년인가로 기억하는데 원동시장에 이 건물이 생겼어. 처음엔 헌책방은 없었는데 60~70년대가 지나면서 거리 좌판 형식으로 헌책방들이 들어섰지. 그러다가 단속이 심해져 좌판을 못하게 되니까 하나 둘씩 건물 안으로 들어왔지”

“47년 정도 됐을걸요. 오래 다니던 단골들은 주로 대학 교수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들 정년퇴직 했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많이 다녔지. 근데 요즘은 도서관에 책이 많으니까 거기서 연구하는 교수들이 많지”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책방을 찾는 오랜 단골들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옛날의 단골들 중에는 장씨의 신세를 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연구를 하는 교수들에게 이곳은 보물창고와도 같았다. 주인이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것도 책방 운영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됐다.

“내가 고소설이나 가사에 관심이 많아. 그래서 미발표 소설들을 보게 되면 문헌을 고찰해서 교수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연락을 해서 가져가라 이랬지. 예전에 미발표 고소설인 <금송아지전>이라는 작품이 있었어. 그 이전에 학계에 발표된 적이 없어서 내가 충남대에 있는 사재동 교수한테 얘기해서 그 양반이 논문을 발표를 했지”

사재동 교수는 <불교계 국문소설의 연구>나 <불교계 국문소설의 형성과정 연구> 등의 책을 펴내면서 <금송아지전>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의 구비문학 가운데 <금송아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본처가 아들을 낳자 이를 시기한 첩이 몰래 아이를 암소에게 주어 먹게 하니, 이 암소가 금송아지를 낳았다. 이 금송아지가 서울로 가 정승의 사위가 된 뒤에 다시 사람이 돼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고려당 주인 장세철씨는 서지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고문헌이 들어올 때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가며 그 희소성의 가치를 찾아내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학계에 있는 연구자들이 이 서점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려당 서적 옆에는 박문서림의 간판이 붙어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얼마 전 문을 닫았다.

“박문서림이 우리집 보다 조금 더 오래된 서점인데, 지난 여름에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어. 이제는 서점을 안해”

옆에 있는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말을 할 때는 옛 친구를 잃은 것 같은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 넘게 헌책방을 함께 하던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홍희표 시인이 사랑한 청양서점

고려당에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면 고려당만큼이나 오래된 청양서점이 자리하고 있다. 비교적 깔끔하게 책들이 꽂혀 있는 서점에는 사십년 세월을 책과 함께 한 여주인이 지키고 있다. 남편은 주로 책을 거둬들이고 지금은 아들이 운영을 맡아하고 있다고 한다. 안주인 김은자씨의 나이는 예순다섯. 남편인 김진문씨가 청양이 고향이라 서점 이름도 청양서점이다. 목원대에서 시를 쓰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지금은 고인이 된 홍희표 교수가 고향 친구라 옛날에는 매일 오다시피했다고 한다. 홍 교수는 친구를 추억하며 청양서점이라는 시도 썼다.


고추 중에 매운 고추는
증말로 청양고추이지유

뒹구는 책 책들을 찾고 찾아
남아있는 자들의 영혼을 가꾸듯

한밭 중앙시장 안 청양서점
칠갑산 같은 김진문 동무 있지유

- 홍희표의 시 <청양서점> 전문-

 

홍희표 시인은 1967년 '현대문학'에 등단한 이래 수많은 시집을 펴냈으며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대전시 문화상' '시와 시학상 작품상' '한국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홍시인이 고향친구가 하는 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한 것은 물론이고 시장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고향시절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옛날에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예전 같지 않죠. 그리고 옛날에는 속에 낙서가 있어도 책을 주저 없이 샀는데 요즘 애들은  낙서 한 두 개 있어도 싫어해요. 또 새책을 사는 경향이 많지 않나 싶어요”

김은자씨는 수 십 년간 학생들을 접하면서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를 그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변화를 목격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옛날보다 애들이 순진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그래도 서점 안에 들어오면 순해지더라구요”

이 말을 들으니 책이 있는 공간은 학생들의 마음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폭력과 왕따 등 학생들의 갈등을 책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책과 관련한 명언이 셀 수 없이 많은 것도 책이 인생의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잠시 독서와 관련한 명언을 살펴보자.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 데카르트) “ 한 권의 좋은 책은 위대한 정신의 귀중한 활력소이고, 삶을 초월하여 보존하려고 방부 처리하여 둔 보물이다” (존 밀턴) “책은 한 권 한 권이 하나의 세계다”(윌리엄 워즈워스) “약간의 돈이 생길 때마다 나는 책을 산다. 그렇게 하고 남는 돈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산다”(에라스무스).

 책방의 안주인은 오랜 세월 책을 접하면서 책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경제관련 책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기억에 남는 책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일제 강점기 때 나온 책인데 일본말로 되었지만 우리생활상이 그림으로 나와있는 책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놔뒀으면 제 값 받을 수 있는데 싸게 팔았던 기억이 있어요.근데  우리가 천원 이천원에 팔았던 책들이 박물관에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좋더라구요”

“요즘은 고객들 연령이 높아지는 게 확연하게 알 수 있어요.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라 그런지아이들이 휴대폰만 열면 웬만한 건 다 나오잖아요.그런 반면에 옛날에 책을 많이 보신 분들은 헌책방 많이 와요. 책이 필요로 하는 분들이 주로 오죠”

스마트폰을 달고 사는 시대에 인터넷은 필수다. 정보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자책이나 웹북이 등장하는 시대에 헌책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아날로그 세대들에게 헌책방은 지혜를 찾는 보고임에는 분명하다.


시대를 따라가는 온라인 헌책방시대


헌책방 운영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이 중의 하나가 국민서적을 운영하는 이창수씨다. 그는 2년 전 이 가게를 인수했다. 책방 앞에는 책과 함께 골동품들이 놓여있었다. 오래된 시계를 비롯해 자잘한 옛소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경영적인 이유로 골동품을 같이하죠. 책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근데 지금이 불경기라 그런지 골동품 거래도 끊겼어요. 경기가 안좋은데 누가 이런 걸 사겠어요. 관심있는 사람들도 당장 지갑을 닫죠”

국민서적의 이창수씨는 가게 앞 2층을 얻어 책을 쌓아놓는 창고로 활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인터넷 책 판매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시작단계이기는 하지만 인터넷홈쇼핑으로 책을 사는 시대에 헌책도 그 대열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층 공간을 들어서니 눈에 들어오는 책 중에 하나가 브리태니커 사전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지금까지 발행된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영어로 쓰인 백과사전이다. 위키백과 자료에 따르면 이 사전은 2012년 3월 15일 종이책 출판이 244년 만에 중단되었다. 브리태니커의 초판은 1768년 12월에 편집, 1771년 3권으로 완간했는데 총 2689쪽이었다. 브리태니커 사전은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 사전을 소장하고 싶은 이들도 많았지만 워낙 가격이 비싸 집안에 들여놓기는 여의치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브리태니커가 종이책 출판을 중단한 것은 하루 평균 870만회가 조회된다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시대는 브리태니커보다는 위키피디아를 원한다”는 말로 작금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200개 이상의 언어로 그것도 무료로 제공되는 백과사전 시대에 브리태니커의 설 자리는 아마도 우리의 헌책방과 그 초상이 닮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직 책을 더 채워넣어야 하는데. 이제 인터넷 판매 시작이니까 더 확충해야죠. 그리고 대전시에서도 헌책방을 살리기 위해 지원도 해주면 좋은데...”

온라인 시대에 걸맞게 헌책방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창수씨. 그는 시의 지원을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전통시장의 현대화 사업은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비 가림 시설을 하거나 주차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대전의 전통시장도 상당부분 리모델링을 했거나 진행 중에 있다. 더불어 전통시장에 문화예술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 곳도 있다. 그런 점에서 헌책방은 문화예술을 입히는 좋은 소재이자 그 자체가 소중한 자원임에는 틀림없다.

 

헌책을 찾는 이가 줄어들고 있다. 원동의 헌책방도 더 줄어들지 모른다. 나이 지긋한 주인의 뒤를 이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도 모른다. 세월을 비껴갈 수 없는 현실에서 대전의 헌책방은 그저 실낱같은 명맥만 이어갈 뿐이다. 하지만 오래된 종이책이 전하는 가치와 정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래된 사람들이 오래된 책을 찾는 곳, 헌책방의 낡아가는 책 냄새를 맡으면 내가 읽었던 과거가 시나브로 깨어난다.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인도했던 문장들도 앞 다투며 뛰쳐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헌책방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이끄는 현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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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밥 기획 특집 2013.11.22 10:49

[대전 원도심 특별기획] 참으로 고운 종소리 - 대흥동성당

우여곡절을 겪은 성당건축

 

 천주교 대전교구의 설정은 1958년이다. 대전교구의 설립과 함께 대흥동 본당은 주교좌 본당으로 그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역할이 많아지면서 성당 건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원 라리보 주교의 사제수품 53주년이 되는 1960년 3월10일에 마침내 대흥동 성당의 기공식을 가졌다. 예나 지금이나 큰 건축물을 짓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다반사다. 특히 1960년에는 사회가 불안정하였고 신자들의 생활도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당을 완공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60년 여름에 기초공사는 마무리됐지만 시공을 담당한 회사들의 갈등으로 지연되다가 1962년 3월에 공사가 재개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대흥동 성당은 같은 해 9월8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12월 31일 준공되었다. 당시 들어간 총공사비는 1억4천만환이다. 건축 당시 성당 건축물은 규모나 양식면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성당 건축물이 고딕 양식의 적벽돌 건물이 많았던 것과는 다르게 이 성당은 시멘트 벽돌을 사용해 마감을 했다.
큰 성당을 내부에 기둥 하나 없이 건축한 것도 높게 평가를 받았다. 성당설계는 이창근이 했고, 설계도는 로마 교황청까지 보냈다. 성당을 지을 당시 찾아온 노기남 대주교와 오기선 신부와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 오 신부, 이건 얼마나 크게 짓고 있는건가?
 “ 아주 조그만해 보이십니까”
 “ 글쎄, 교우 몇 명이나 앉을까 모르겠네”
“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명동 대성당보다 백평이 더 큽니다. 그만하면 교우 몇은 앉을수 있지 않을까요 허허허”
 “ 예끼 이사람,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나? 명동 대성당보다 크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오신부는 실제로 기술자를 명동성당에 보내 실측을 해봤다고 한다. 그 결과 대흥동 본당이 큰 것으로 파악이 됐으나, 실제로는 명동성당이 90평 가량 더 크다고 한다. 이런 해프닝이 있잇던 것은 명동성당과 비견될 만큼 규모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성당을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오신부는 건축하는 과정에서 대전 신사에서 사용하였던 화강암을 자져다가 성당 창 아래를 두르고, 영세대와 성수대는 신사 제단에 쓰던 것을 가지고 와서 변형해 사용했다. 이는 로마시대 박해가 끝난 후 판테온 신전을 성당으로 변형시켜 사용한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젊은 작가들, 성당에 예술을 입히다

 

성당의 규모도 관심을 모았지만 대흥동 성당의 외벽에는 열두 사도의 부조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여섯사도는 이남규 교수의 작품이다. 나머지 여섯 작품은 최종태 교수의 작품이다. 최종태 교수와 이남규 교수는 중학교 미술반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였다. 두 사람은 대학교까지 1년 선후배사이로 인연을 이어갔으며 두명 다 대흥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주임신부였던 오기선 신부가 두 명의 무명작가에서 작품을 의뢰한 것은 상당한 파격이었다. 두 젊은 작가들은 필요한 재료비만 받고 긴 작업을 이어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종태 교수의 생전의 회고를 잠시 살펴보자

 “저는 천안고등학교에서 작업을 했지만. 따로 작업공간이 없던 이남규 교수는 여름방학 때 대전공고에서 교실 하나를 빌려 작업을 했어요. 작업을 하는 동안 오 신부님은 거의 매일 작업 현장에 오셔서 책을 읽으면서 우리 곁은 지켜주곤 했어요. 그리고 작업이 끝나면 늘 우리를 데리고 가서 불고기에 소주를 사 주시곤 했어요. 당시로서는 불고기가 아주 귀하고 비싼 음식이었거든요” (대흥동 본당 85년사 인용)
 
 젊은 작가에 기대와 지원은 최종태 교수의 작품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최교수가 성모상을 제작하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는데, 성모 마리아에게 치마 저고리를 입힌 것이다. 이처럼 낯선 성모상은 신자들의 구설수에 오르고 반대도 많았지만, 오신부는 2미터가 넘는 이 성모상을 성전 제대 오른쪽에 세우고 왼쪽에는 소화 테레사 성녀상을 세웠다. 마찬가지로 2미터가 넘는 성 요셉상은 제단 정면 벽 상단에 세워졌다.
최종태 교수의 작품은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당시 관리개념이 희박했던 시기에 발생한 안타까운 일이다. 고인이 생전에 했던 회고담을 살펴보자

 “ 언젠가 대흥동 성당 내벽에 그려진 부 신부님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갔더니 성모상과 성 요셉상이 둘다 보이지 않는 거예요. 물론 행방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요. 사실 그 작품들은 제 초창기 작품이라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최초의 한국적인 성모상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거든요.”

자신의 작품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작가의 실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우리 미술사에서도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45년 세월을 지킨 종지기

 

대흥동성당을 성당답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종소리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정오와 저녁 7시에 대흥동 일대에는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대흥동 성당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종은 대흥동 성당을 상징하는 소리가 됐다. 경박스럽지 않고 요란하지도 않다. 잠시 방황하는 영혼을 적시는 종소리를 소재로 쓴 이해인 수녀의 시를 음미해보자

 

 

종소리 

 

항상 들어도

항상 새로운

당신의 첫 소리

방황하며

지친 내 영혼

울다 울다 쓰러져

다시 들으며

나를 찾네

 

 

멀리 있고

높이 있어도

늘 가깝고

귀에 익은

그리움의 힘이여

죽어도 잊을 수 없고

절망 속에도

쉽게 떠날 수 없는

처음의 사랑이여

 

 

울다 쓰러진 지친 영혼을 달래는 종소리는 수도자에게만 의미 있게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대흥동 거리를 걷는 이들 또한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곤 했을 것이다. 맑은 종소리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은 올해 예순일곱의 조정형씨. 성당에서는 세례명인 방지거 아저씨라고 부른다.

방지거 아저씨가 대흥동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9년부터다. 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은 방지거 아저씨는 아는 신자의 소개로 대흥동 본당 관리직으로 들어왔다. 청소를 하고 본당을 찾는 차량관리를 하고 규모가 큰 성당의 이곳 저곳을 손보는게  그의 주된 업무다. 종지기가 된 것도 그때 부터다. 처음에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씩 종을 쳤지만 아침시간에는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와 점심과 저녁 2번만 치게 됐다. 45년 동안 종을 쳤으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이다.

 

 몇 년 전 중년의 여성이 성당을 찾았다. 대흥동 성당을 다니는 신자는 아니었다.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성당입구에서 종을 치는 사람을 찾았다. 방지거 아저씨는 그 여성이 낯설었다.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아저씨, 저는 오래 전에 대전여중을 졸업한 학생인데요. 문득 이 곳 앞을 지나다 보니까 종소리가 생각나서 들어왔어요. 저 학교 다닐 때 3년 동안 들었던 종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웠는데요. 그 종소리를 만들어준 분에게 감사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대흥동성당 바로 옆에 대전여중이 자리하고 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적어도 점심시간 만큼은 그 종소리를 들었다. 어린 여학생에게 그 종소리가 오랫동안 각인된 모양이었다.

또 한 번은 성당 인근에 사는 외국인 한분이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성당관계자에게 외국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제가 며칠째 종소리를 듣고 있는데요. 지난주 치던 종소리랑 느낌이 다르던데 종에 무슨 문제가 생긴건가요?”

이 전화는 성당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 것은 종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종지기인 방지거 아저씨가 종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방지거 아저씨는 로마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떠났기 때문에 타종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던 것이다. 숙련되지 않은 솜씨로 종을 친 것을 이 외국인이 알아차린 것이었다.

대흥동 성당 종 축성식이 거행된 것은 1963년 3월 10일. 크기가 다른 세계의 종은 모두 프랑스에서 주문한 것인데, 당시 본당 신자인 유도순(루가) 김학분(테레사) 부부가 기증하였다. 예배당 2층부터 시작되는 백개 가까운 계단을 오르면 성당 꼭대기에 종이 있다. 이 종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데 간결하고 웅장하고 깊이있는 소리를 낸다.

방지거 아저씨는 주교님이 선물한 시계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종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종줄에 매달리듯 당긴다. 그가 주교님에게 처음에 받은 시계는 세이코. 그 다음은 오메가 시계였다고 기억한다, 한동안은 시계를 보고 종을 쳤지만 세월의 흐름 탓에 시계가 고장났고, 그 다음부터는 평화방송의 시보에 맞춰 종을 치고 있다. 그는 성당의 관사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1969년부터 사택에서 지내고 있으니 그 세월도 엄청나다. 종소리를 쌓을 수 만 있다면 그 높이는 가늠하기 없을 정도로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의 자랑보다는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돌아보기를 바라고 있다.

 
“내 종소리를 들으면서 잘못을 회개하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면 종을 치는 일도 복음이 되지 않을까요”

방지거 아저씨에게 자신이 치는 종소리를 듣고 해줬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종소리가 참 곱네요, 이 말이 가장 듣기가 좋아요”

곱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상황이나 물질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녔지만 최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 (무엇의 모양이나 빛깔이) 보기 좋게 산뜻하고 아름답다.
 · (마음씨나 말씨가) 상냥하고 순하다.
 · (물체의 표면이나 결이) 거칠지 않고 매끄럽다.
 · (소리가) 듣기에 거친 데가 없이 맑고 부드럽다.
 · (무엇이) 마음에 기껍고 탐탁하여 사랑스럽다.
 · (가루가) 아주 잘아서 만졌을 때 느낌이 보드랍다.
 · (피륙이)올이 가늘고 촘촘하여 섬세하다.

그는 명동성당의 종소리도 들어보았다. 꿈에 그리던 노트르담 성당의 종도 쳐봤다. 하지만 방지거 아저씨는 대흥동 성당의 종소리만큼 곱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듣기에 거친 데가 없이 맑고 부드럽다는 뜻의 곱다, 아마도 마음의 결이 거칠지 않고 매끄럽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해외순례를 나가거나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항상 종을 쳐온 종지기 인생.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종탑을 계속 오른다.

“ 마음이 괴로울 때 종을 치고 나면 한결 나아져요. 걸을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마지막까지 이 종탑에 오를 겁니다”

 

 


관계를 깨닫게 하는 알람

 

대흥동성당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두 차례 어김없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종교와 무관하게 종소리를 인식하는 태도는 각기 다를 것이다. 12시 점심시간에 종소리가 울리면 대흥동 직장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 벌써 점심시간이네, 오늘은 뭘 먹지, 사리원면옥에 가서 냉면 먹을까”
“ 수라면옥에서 갈비탕 먹으면 어때요?”
“ 아, 오랜만에 스마일칼국수에 가서 국수랑 김밥 먹으면 어때?”
“ 태화장 자장면은 어떤가?”
“ 과장님, 돌아오는 길에 후식으로 성심당 튀김소보로는 어떤가요”

생각만 해도 입맛을 돋우게 하는 식당들은 대흥동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난 뒤 저녁 7시에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늘 저녁 진로집에서 소주 한 잔 어때?”
“두부두루치기 좋죠”
“소주 말고 내집에서 막걸리 한잔 먹으면 어때요”
“그럼 소주 한잔 하고 난 뒤 설탕수박에서 맥주로 입가심하자구”

하루 두 번의 종소리가 사람들을 이어주는 곳, 성당의 종소리가 있어 대흥동 거리는 낭만과 추억이 쌓여간다. 종소리의 여운이 가시면 대흥동에는 젊은 연인과 중년의 직장인들이 밤거리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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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밥 기획 특집 2013.11.21 16:21

[원도심 기획 특집] 대전의 진입로, 대전역 지하상가

대전을 처음 만나는 곳

 경부선 기차를 이용해 대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대전역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대전역에서 대전시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목적지가 회덕 방면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대전역 지하상가를 거쳐 간다. 대전역이 대전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라면 대전역지하상가는 대전시내로 안내하는 진입로인 셈이다. 2004년 KTX 개통과 함께 현 대전역사가 신축되기 전에는 대전역지하상가는 넓은 대전역 광장과 대전의 다운타운을 이어주는, 주요 통행로였다. 1970~80년대 대전역 주변은 대전의 중심지요 번화가였다. 젊은이들은 대전역 광장 시계탑에서 만나 지하상가를 지나 에펠제과와 태극당, 은모래커피숍, 중앙극장, 아카데미극장, 신도극장에서 데이트를 즐기고는 했다. 젊은이들의 쇼핑의 중심지 또한 대전역지하상가였다. 1974년 들어선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를 비롯해 브라더백화점, 중앙시장, 역전시장 등이 대전역지하상가 인근에 위치해 있어 이곳은 대전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당연히 사람들로 언제나 북새통이었고 대전역지하상가는 이 시설들을 연결하는 주요 통행로여서 상권이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 2차 중앙로지하상가가 완공되고 그 후 대전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가 철거되면서 원도심 상권의 중심이 은행동으로 이동하게 되고 대전역지하상가는 쇠퇴기를 맞는다. 원도심 활성화 사업도 중앙로지하상가 주변의 선화동, 은행동, 대흥동 일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어 상대적으로 소외된 대전역지하상가 주변은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앙시장 현대화 사업이 진행되기는 했으나 그만으로는 역부족인 듯 보인다. 원도심이 활성화되기 위해서 대전역 주변 상권 회복은 필수 요소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원도심 활성화는 대전역지하상가와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화려했던 시절의 뒤안길

1981년 완공된 대전역지하상가(길이 270m, 면적 5천808㎡)에는 현재 200여 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다. 완공 이후 대전역, 중앙시장과 함께 대전 경제발전의 핵심역할을 해왔다. 대전역지하상가는 ‘젊은이의 거리’인 은행동 상권과 접해 있으며 한약특화거리, 인쇄거리, 한복특화거리 등 다양하고 전문적인 상권을 연결하는 교차로이다. 그러나 화려했던 과거의 명성을 뒤로 한 채 대전역지하상가는 1990년대 둔산 신도심 개발 이후 침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낙후된 시설과 공공기관의 이전, 재래시장 쇠퇴 등으로 상권에 위협을 받고 있다. 지하철 1호선 완공과 함께 각종 원도심 활성화 정책으로 상권이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아직까지 옛 명성을 되찾기에는 미약한 상황이다.

“조용한 대전에서 그나마 가장 번잡한 곳을 꼽으라면 중앙로이다. 중앙로는 대전역과 지하상가로 이어져 있다. 대전 도시철도 1호선이 지나가고 시내버스들이 많이 다녀 중심지로 꼽힌다. 지방 상권 중에서는 유일하게 유동 인구 중 남성 30대 비율이 20대 비율을 웃돈다. 주요 소비 업종은 식당과 술집이다. 중앙로는 한 건당 결제 금액이 크게 낮다. 중앙로 음식값은 서울에 비하면 아주 저렴하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리조또가 7천원도 채 되지 않는다. 서울 지역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시사저널 1179호, 2012. 5. 23)”

원도심 상권이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대전역지하상가는 특히 더 빠른 속도로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덕 지역이나 산내에서 둔산 지역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환승하는 환승지로서의 지위만 유지하는 편이다. 대전 주요 노선의 시내버스가 대전역을 경유하지만 대전역 인근에서 하차하는 승객들은 대부분 다음 버스로 갈아타거나 은행동 쪽으로 이동한다. 대전역 지하상가 인근의 버스 승강장에서 대기하는 동안 지상상가 점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지하상가 점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지하상가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은행동으로 이동하기 위한 통행로로서 주로 이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전역세권에서 핵심은 은행동 ‘으능정이 문화거리’ 양쪽에 조성된 패션상가와 먹자골목이다. 문화거리라고 간판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서울 명동처럼 10대와 20대들이 쇼핑과 외식, 유흥을 즐기는 ‘소비의 거리’라고 부를 만한 곳이다. 한마디로 ‘대전의 명동’이라는 별칭이 어울린다.(한국경제신문, 2007. 2. 4)”

지난 2002년 리모델링 공사 이후 다소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하더라도 대전역지하상가의 상권이 은행동과 대흥동으로 완전히 이동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외부에서는 으능정이 거리를 대전의 명동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번창했던 대전역 지하상가의 번성함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상권 활성화를 위한 편의시설 개량 및 확보

대전역지하상가를 이용하는 유동인구가 그대로 흘러가는 인구가 아니라 머물러 쉬는 인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대흥동과 은행동에는 ‘우리들 공원’을 비롯해 으능정이 거리의 야외무대, 각종 소극장, 라이브카페 등이 위치해 있어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고 그 공간을 활용한 문화예술 관련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그러나 대전역지하상가는 대전역과 은행동, 대흥동을 이어주는 단순 통행로로 이용되거나 멀티플렉스와 백화점, 대형마트가 위치한 서대전네거리로 이동하기 위한 환승지 역할을 한다. 이렇게 흐르는 인구를 머무는 인구로 바꿀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2013년 9월 첫 주 중앙로지하상가 일원에서 열리는 문화행사를 보자.

옛 도청 앞 지하상가 ‘이벤트홀 회원 작품집 북 콘서트’(대전중구문학회) / 은행교 ‘마당극 별을 먹는 장돌뱅이’(마당극패 우금치) / 은행교 ‘대전사랑 대전노래 ‘대전부르스’ 콘서트’(대전인문 공동체) / 청소년 문화마당 ‘주민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힐링축제’’(청소년 교육·문화공동체 ‘청춘’) / 으능정이 문화거리 ‘문화나눔, 이웃사랑 ‘찾아가는 원도심 문화 흥마당’’(극단 아낌없이 주는 나무) / 으능정이 거리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주민과 함께하는 색소폰 한마당’(한빛 색소폰 동호회) / 대전역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시민과 함께 소통하는 전통음악회 국악연주’(아리) / 청소년 문화마당 ‘김란의 전통춤 공연’(김란무용단) / 은행교 ‘금요 국악콘서트’(한국국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 / 옛 도청 앞 지하상가 무대 ‘2013 시민과 즐기는 재미있는 현대무용’(Meta Dance) / (구)밀라노21 무대 ‘시민들과 함께하는 댄스페스티벌’(이승경) / 평생학습관 앞 ‘T끌 프로젝트’ / 은행교 ‘거리극 페스티벌’(김기영) / 은행교 ‘덩덕쿵 얼쑤 놀러가자 시장에 실버풍물단’(예향)
(뉴스1, 2013. 9. 6)

이러한 문화행사들은 유동인구가 중앙로지하상가 인근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유인을 제공하고 중앙로지하상가와 지상상가의 잠재적 고객으로서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한다. 대전역지하상가와 중앙로지하상가 사이의 변별점이다. 물론 대전역지하상가 역시 인근에 인쇄거리와 한약특화거리, 중앙시장 등이 위치해 있어 대전역지하상가로의 유인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쇄거리와 한약특화거리, 중앙시장을 이용하는 주 연령층이 중장년층임을 고려하면 그 유인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소비를 이끄는 주류는 20~30대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난 2002년 리모델링 이후 대전역지하상가의 환경을 쾌적하게 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중앙시장의 아케이드 설치와 노점 정비 공사도 최근 소비자들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고 보면 쾌적한 쇼핑 환경은 잠재적 구매자들이 조금 더 머무를 수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대전시설관리공단은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지하상가 내 화장실을 백화점에 버금가는 현대식 화장실로 리모델링한데 이어 지하상가 내 벤치 주변에 화분을 설치했다. 그러나 장애인 편의시설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장애인의 접근성을 강화하기 위한 시설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도시철도 역사에 설치된 엘리베이터가 장애인 접근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있으나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공간적 여건이나 경제성 측면에서 엘리베이터 설치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리프트의 안전성을 수시로 점검해서 리프트를 이용하는 장애인의 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장애인들도 보다 자유롭게 지하상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전역지하상가의 실내공기의 질은 양호하다고 한다. 지하라는 특수한 공간이므로 실내 환기는 보다 면밀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주기적으로 실시한 측정 결과는 긍정적이다. 쾌적한 실내 환경은 즐거운 쇼핑과 직결 되는 핵심 요소일 수밖에 없다. 다행히 대전보건환경연구원과 한밭대학교 산학 협력단의 공기상태 측정 결과 이산화탄소 등 9개 기준 항목 모두 법정기준치를 크게 밑돌았다고 한다.(환경일보, 2013. 6. 14)
더불어 동구청에서 운영하는 공영주차장 두 곳과 인쇄거리의 노변주차장, 대전역, 중앙시장에 확보되어 있는 주차장은 쇼핑인구 유입에 적잖은 도움이 되고 있다.

 

 

 

주변 상가의 현실

인쇄거리에서 대전역지하상가로 이어지는 상권은 저녁시간에는 특히 어둡다.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각 점포의 특성 상 늦은 밤까지 영업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 점포가 영업을 마친 인쇄거리, 한약특화거리는 이른 어둠보다 더 불편한 요소가 공존한다. 이 거리에서는 장년의 여인들이 지나치는 남성 행인의 뒤를 따르며 흥정을 유도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어둠이 내린 한약거리를 걸어본 시민이라면 흔히 경험하는 풍경이다.

유천동 집창촌이 폐쇄되는 상황에서도 유독 대전역 주변 집창촌은 살아남았다. 대전역 주변 집창촌은 특히 여성들의 통행에 위협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심야도 아닌 시간부터 벌어지는 호객행위는 여성들이 대전역 상권 주변을 기피하게 하는 요인이다. 원도심 중 특히 대전역 주변은 밤 시간에 더욱 어두워진다. 때문에 통행자들의 대부분은 지하상가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 시간대 통행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대전역을 오가거나 버스 환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지하상가의 활성화가 대전역세권 개발과 밀접하게 연관성을 갖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특화전략의 필요성

역세권 개발이 당초 예상보다 지지부진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 제2지하상가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기존 지하상가(대전역∼옛 충남도청)와 X축을 이루는 제2 지하상가 조성안은 대전역 증축을 비롯한 대전역세권 개발사업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나온 제안이어서 앞으로 동구지역의 최대 과제로 떠오를 전망이다. 원동네거리∼삼성네거리 구간 지하상가가 조성될 경우 인근 재래시장인 중앙시장과 대전역세권 부흥 등 원도심 활성화의 결정적 전기가 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원동네거리∼삼성네거리 구간 지하상가 조성사업은 지하 1층 연면적 2만922㎡에 159대의 주차시설을 갖추고 쇼핑, 문화, 테마광장 등 다양한 세대를 겨냥한 공간구조로 만들 계획이다. 민간자본 1852억원을 필요로 한다.(국민일보, 2013. 2. 7)”

 

이 제안은 민간자본의 사업 수행 능력과 상가 분양 문제 등의 이유로 사업추진 가능성이 불투명한 가운데 지하상가의 답답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역세권 개발에 대한 애초의 시각을 수정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둔산 신도심과 차별화 된 개발 로드맵이 필요하다. 대흥동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 타운 조성처럼 대전역 주변을 특화하는 개발 정책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대전역세권 개발과 대전역지하상가는 공생 관계이기 때문이다.

 

대전시는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각종 회의·행사 원도심 소재 기관 개최’, ‘재활용 벼룩시장 및 직거래 장터 등 각종 판매행사 도청사 광장 활용’, ‘도심활성화기획단 등 원도심 관련 기관 도청사 입주’, ‘시청 공무원의 도청사 인근 음식점 이용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대책들의 대부분이 중앙로지하상가 인근 지역에서 시행되는 것은 여전히 문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대전역지하상가를 차별화하고 특화할 수 있는 개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대전역지하상가는 원도심 활성화 대책의 변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상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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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밥 기획 특집 2013.11.14 10:19

[대전 원도심 기획특집] 목척시장, 따스한 시선들의 향연


 목척시장은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자생적으로 생겨 난 시장이다. 목척교 대우당약국으로부터 선화초등학교 앞까지의 동네를 아우른 도심 한복판. 시장을 찾아가는 길엔 명랑한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그러나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200여 개의 점포가 성황을 이뤘다는 시장은 여기가 시장이 맞나 할 정도로 한적하다.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공교롭게도 오늘 폐업했다는 슈퍼 아주머니가 텅 빈 점포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늦은 점심인지 새참인지를 드시고 계시는 모습이었다. 간판은 이미 내려져 있고 물건들도 다 빠졌지만 누구에게 인수하는 것도 아니라서 진열장을 뜯어내고 냉장고 등을 씻느라 하루 종일 걸리고 있다는 말씀이시다. 시장 입구, 목 좋은 사거리 슈퍼도 문을 닫고 있는 형편이니 더 오래 머물러 있기가 민망했다. 맞은편 슈퍼, 태성상회 아주머니도 심란하신 모양인지 어떤 여자분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계시다. 배추를 절이고 있는 빨간 함지와  겹겹 쌓인 박스더미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아주머니의 얼굴과 겹쳐지고 있다. 
 셔터문이 굳게 내려진 점포들이 많다. 닫힌 점포 앞에는 합판과 나무토막들이 함부로 쌓여 있고, 점포 처마의 천막이 찢겨져 있는 걸 보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다는 흔적들이다. 그 사이 고소한 향내를 풍기는 ‘목척 기름집’이 있다. 기름병에 기름이 찰랑거리는 모습이 그려진 미니간판이 쓸쓸한 풍경 속에서 가을 햇살처럼 맑게 다가온다. 오늘은 손님이 보이지 않지만 들깨와 참깨를 들고 사람들이 오고간 흔적은 향기로 남아 시장 골목에 번지고 있다.
 
 “구경할 것도 없어요. 사람들이 없는 걸 뭐. 여기가 등록도 안 된 시장이래요. 재개발 소문이 돌자 원주민들이 떠나고 투자자들 손에 땅이 넘어가고……장사를 하는 집도 지금은 몇  안 돼요. 옛날엔 여기가 중앙시장 다음으로 큰 시장이었고, 역전시장보다 먼저 생겼대요.”

 가게 앞에 앉아 파를 다듬고 있던 ‘시민닭집’ 아주머니는 여기서 장사를 시작한 지 17년 년 밖에 안 되어 잘 모른다고, 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아저씨를 가리키며 따라가 보라고 한다. 아주머니의 손짓에 아저씨도 낯선 여자가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며 자전거를 밀고 나가신다. “어휴, 김 사장 능력 좋아!” 골목에 앉아 있던 아저씨들이 농담을 날리신다. 나도 갑자기 ‘어여쁜 여자’가 된 기분이다. 자전거 아저씨는 ‘한밭 칼국수’ 김수길 사장님이시다. 시장 본통에서 살짝 옆 골목에 위치한 한밭 칼국수는 제법 큰 점포에 종업원도 여럿,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칼국수와 두부탕 등이 주 메뉴이다. 가게 앞 시멘트 담벼락 우듬지에는 예술인들이 만들어 놓은 나무새 조각들이 ‘훨훨’ 날고 있다.

 “10여 년 전 재개발 소문이 직격탄이었어요. 땅값이 오르자 팔고 나가고 이사 가고 시장상인이 없어지고 인구가 줄면서 여기가 점점 텅 비어 간 거죠. 평당 250만 원이었던 것이 재개발 소문이 돌자 평당 1,500만 원으로 껑충 뛰었는데, 지금은 평당 7,800만 원에도 매매가 이루어지 않습니다.”
 
재개발사업은 낙후된 지역의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이윤의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 당시 재개발사업추진협의회 사무실도 갖추고 있었지만 천정부지로 땅값이 오르자 민영사업체나 공적기관 어느 누구도 덤비려 하지 않아 재개발사업이 무산되었다는 것. 그러나 도심 한복판 상업지역이라 오른 땅값은 쉬이 내려가질 않고, 언제 어느 때 다시 재개발 바람이 불지도 모를 일이어서 가게를 얻으러 오는 발걸음도 뚝 끊기고, 개발과 변화의 바람을 쫓아가지 못한 목척시장 일대는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걷는다.

 “지금으로서는 희망이 안 보여요. 우리 집은 30년 전통의 맛과 노하우로 방송 3사의 맛집으로 소개되면서 그나마 흑자에 가까운 쪽이지만 시장통 대부분은 적자인데도 할 수 없이 붙들고 있는 것이죠. 그래도 저기 안도르 찻집에서 프리마켓을 열고 있어 사람들이 오고 우리 식당에 밥 먹으러 오기도 하니 도움이 됩니다.”

 목척시장에서 2012년 12월 29일부터 2013년 1월 20일까지 진행된 전시, <마주하는 인사>는 대전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원도심 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한 참여자들이 만드는 문화, 예술에너지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당시의 전시로 목척시장 일대 골목에 벽화가 그려졌고, 한밭 칼국수 앞 담벼락의 나무새 조각도 그때의 작품이다. 목척시장이 활기를 되찾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안도르 찻집엔 마지막에 들르기로 하고 다시 시장통으로 접어들자 ‘시민닭집’ 아주머니가 반갑게 손짓하신다.

 “보잘것 없는 곳 둘러보느라 고생이 많네. 한 잔 하셔야지.”
 “이거 내가 직접 주워온 도토리로 쑨 묵이야. 진짜배기여. 드셔 봐.”
 “어이 쭈꾸미 떨어졌어. 참외도 더 깎아 봐요.”
 좁은 시장통을 울리는 따뜻한 목소리들 속에 끼여 나도 소주 한 잔을 받는다. 아까 농담을 날리셨던 아저씨들과 시장 아주머니들 대여섯 분이 둘러서서 웃음꽃이 피었다. 도토리묵은 첫맛은 쌉쌀한 듯하다가 끝맛은 달큰하게 넘어간다.
 “재개발사업도 그렇지만 시청과 법원이 둔산동으로 이주하고 색시촌이 유천동으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시장도 죽은 거예요. 아무리 좋은 물건을 펼쳐 놓으면 뭘해요. 사람들이 오가야 시장이 되지.”
 “대형마트가 판치는 세상에 재래시장이 버틸 수 있간유?”
 “개발이 되는 데가 있으면 저물어가는 지역도 있는 거유. 새삼 울 일도 아녀.”
 “재미난 일? 이게 재미지 뭐. 시장 사람들이랑 어울려 이렇게 음식도 나눠 먹고 술도 나눠 먹는 재미로 버티는 거지.” 
 “옛날 시장이 번창할 때는 누구네 자식 결혼식날이나 김장 담그는 날엔 시장 골목에 상 펴 놓고 즐비하게 앉아 먹고 놀았어요. 보름날엔 윷놀이도 걸판지게 하고.”

 현재 남아 있는 시장 상인들은 재개발사업을 원하지도 않는 분위기다. 재개발사업이 진행되면 그나마 이어가던 장사를 접거나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재개발바람이 불 때도 다른 곳엘 가 새로운 가게를 얻을 수 있는 자본이 없어 떠나지 못했던 그들이다. 올해 연세가 칠십일 세인 ‘한밭 칼국수’ 김수길 씨도 ‘연산상회’ 아저씨도 사는 날까지 장사를 계속하시겠다고 한다. ‘연산상회’ 아저씨는 누군가 이 시장통에서 제일 부자라고 하자 너털웃음을 짓는다. 가게 쪽방에서 새우잠 자는 형편인데 무슨 소리냐는 거다. 점포가 비니까 여기저기를 창고로 쓰는 것이고, 가게를 열고 있는 한 손님이 찾는 물건이 없으면 피차 불편하니 물건을 채워놓는 것뿐이지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는 말씀이시다. 한 블록만 나가도 갤러리아백화점 동백점이 있는 도심 복판. 원도심 중에서도 으능정이와 중앙로는 최근 활기를 찾아가고 있지만, 이곳은 땅값만 비싼 애물단지로 전락하여 상업지역의 역할에서 소외되고 있다. 그런데 땅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외지 투자자들이라고 한다. 목척시장의 몇 개 안 남은 점포의 상인들은 세입자로 이곳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방값이 싸고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다 보니 밤에는 우범지역이 되어 함부로 나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아파트로 치면 40평대인데 사글세 20만 원이예요. 대전 어디서 이런 방을 구할 수 있겠어요.”
 박성대 씨도 방값이 싼 이유로 십 년 전 이곳에 들어왔다. ‘시민닭집’ 과 ‘목척 떡 방앗간’ 건물 이층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박성대 씨를 따라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지붕이 뾰족한 일본식 건물들은 슬레이트와 목재기둥들이 낡아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채 보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건물들. 옥상에 올라 시장을 둘러보자 쓸쓸한 풍경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시장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목욕탕 굴뚝에는 수리 중인지 허물려는 것인지 철근 구조물이 쳐 있다. 들고양이들이 지붕과 지붕을 넘나들고 있다. 몇 집 옥상에 가꾸어져 있는 텃밭이 반짝 푸르렀는데, 박성대 씨의 넓은 옥상에도 고구마, 열무, 부추, 파, 고추, 가지, 깨 등 갖가지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어느 텃밭 부럽지 않겠어요?”
 “그렇죠. 옥상에 텃밭 일구고 동네 분들과 어울려 가족처럼 단란하게 지내는 재미로 이 동네를 떠날 수 없어요.”
 
 옥상에서 마을을 굽어보자 사람들이 사는 골목이 궁금해진다. 가을 초입인데 감나무 잎 몇 개가 노랗게 물들어 떨어져 있다. 주택가는 시장통에 비해 한결 깨끗하고 고즈넉하다. 두서넛 걸어갈 수 있는 골목과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이 교차하면서 담벼락과 담벼락이 잇대어 있다. 그 담벼락에 언뜻언뜻 꽃그림, 새그림, 나무그림 벽화들이 알록달록 그려져 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행복하세요.” 어느 골목에선 벽화를 그린 대학생들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벽화가 좀 더 많았으면 아쉬움이 고개를 든다
 대문 앞에 앉아 채소를 다듬으며 담소를 나누시는 아주머니들. 서로의 대문 앞에 앉으면 그대로 마주보는 시선이 되는 골목이다. 한 골목에선 팬티를 내린 여자아이가 “할머니 응가 했어요.” 걸어 나오고, 친구분들과 평상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아이구 지지배야, 볼썽사납게시리…….” 휴지를 말아쥐고 마주 뛰어나오는 풍경은 얼마나 따스한가. 도심 복판에서 만나기 어려운,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진정한 커뮤니티가 살아 숨 쉬는, 골목의 향연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목척시장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어우러지는 모습들이 이곳에서 가장 빛나는 풍경이다.

 “예전엔 의자 3개에 아가씨도 있고 직원도 있었어요. 지금은 의자 두 개에 혼자서 꾸려가고 있지만요. 그래도 이발소 하면서 오남매 다 키우고 대전시 봉사상도 받았으니 보람이라면 보람이죠.” 
 대전시에서 13번째로 허가된 집. ‘조은이발소’ 정동진 사장님은 50년째 이 동네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계시는 터줏대감이시다. 올해 연세가 일흔일곱이라 하시는데, 정정하실 뿐만 아니라 꽤 미남이시다. ‘一心’이라는 한자가 수놓아져 있는 액자와 소독장. 가지런히 걸려 있는 이발용품들. 현대식 이발소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돌로 만든 명품 세면대. 손님의 머리를 감길 때 쓸 물을 받아 놓는 작은 타일박스. 이발비용이 가지런히 적힌 액자.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한 실내 모습이다. 1980년대에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셨는데, 틈틈이 서민아파트 노인분들에게 이발봉사를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셨단다. 뜻밖에 대전시 표창장도 받으셨지만 상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니 지금도 이발봉사는 계속하고 계시다. 담백한 옛 정취가 흐르는 이발소에 잠깐 앉아 있는 사이 고향에 돌아온 듯 포근한 감회에 젖는다. 정동진 씨도 쓰러지기 전까지는 이발소를 계속 하시겠다고 한다. 이발소 앞 골목에는 꽃과 나무들을 심어 놓은 제법 큰 화분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어 작은 정원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이 마을이 저 나무들처럼 다시 푸르러질 때가 올까.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여든이 다 된 노역에도 삶의 터전을 놓지 않는 분들이 계시지 않은가.

 시장 골목 ‘대발이식당’으로 들어선다.
 “점심이여, 저녁이여? 집집 찾아다니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지.”
 오후 내내 시장골목을 돌고 도는 나와 몇 번이나 마주친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구청에서 나온 직원쯤으로 알고 계시나보다. 국밥과 막걸리를 팔고 있는 대발이식당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는 식탁 4개, 신발을 신고 앉을 수 있는 탁자 3개가 놓여 있다. 한 켠, 연탄창고가 있는데도 비교적 깔끔한 모습이다. 남자 손님 두 분이 식사를 하며 막걸리를 들고 계셨는데, 나 말고도 손님이 있다는 게 괜시리 반가웠다. “손님이 없어 굶어 죽겠어요.” 처음 만났을 때 골목에 물을 찌끄리면서 중얼거리시던 아주머니 말씀이 생각나서이다. 아주머니는 선지국밥을 내려놓으면서도, 다 먹는 동안에도, 밥 더 주랴, 반찬 더 주랴, 몇 차례나 물어오신다. 손님을 챙기는 정성이 따듯했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어둠이 꽉 차게 내려앉았다. 불빛이 켜진 시장통은 낮보다 환히 가게 안이 보이면서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대발이식당과 옛날손칼국수 사이 골목에 있는 현대식 공중화장실에도 불이 들어와 있다. 하루 매상을 셈해 보는 ‘연산상회’ 아저씨와 아주머니. 혹, 오늘의 첫 매상은 아닌지, 닭 한 마리를 손질해 팔고 있는 ‘시민닭집’ 아주머니. 낮엔 문이 열려 있는지 가늠이 안 되었던 ‘붐비나 의류수선집’ 아주머니도 부지런히 미싱을 돌리고 있고, 손님은 출입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기다리고 있다. 오늘 폐업한 슈퍼 아주머니는 지금까지 정리를 못 끝내셨는지 허리를 못 펴고 계시다. 가게 문은 닫았어도 어둠이 내리자 불을 켜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비추인다. 빈 가게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시장 골목을 뎁히고 있다.

 시장골목 끝에서 일직선상으로 위치한, 한 편의 서정시 같은 ‘안도르 찻집’. 옛 대전부윤의 관사였던 곳. 한때 귀신이 나오는 폐가로 불리며 수십 년 간 방치되어 있던 이 건물은 한 사업가와 지역예술인들의 손에 의해 카페로 재탄생한다. 입구에는 150년이 넘은 향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있고, 불빛 환한 마당엔 키 작은 꽃들이 소담하게 피어 있다. 교실 마룻바닥, 담백한 실내디자인으로 서정적인 찻집 안에서는 김윤희의 ‘그림일기전’이 전시 중이었다. “그날 그날의 나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즉흥적인 표현방식을 이용한다. 성숙하고 현명해 보이기 위한 외면적인 나의 모습을 위해 억누르고 감추어야 하는 그림자와 같은 나의 이면을 나의 그림으로 드러내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라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음악이 흐르고 낯선 손님의 발걸음에도 경계 없이 걸어다니는 마당 고양이들의 움직임을 쫓다가, 정원 흰 의자에 앉는다. 거기에서 안도로 찻집 주인의 명령(?)하에 ‘목척시장은 살아있다’는 주제로 기획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젊은 사진작가 두 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목척시장이 살아 있다는 이미지를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 고민 중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다, 라는 표현보다 이어가고 있다, 라는 표현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프리마켓요? 매월 첫째주, 셋째주 토요일 1시에서 6시까지 열리는데 많게는 70-80개, 적게는 50개 정도의 좌판이 열립니다. 구제품, 악세사리 같은 창작품, 즉석 케리커쳐 등이 인기 좌판들이죠. 주로 20대 대학생들이 와서 팔고 가는 형식인데 홍보가 덜 되어 정착되었다라고 하기엔 아직 멀어요.”

 목척시장 일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있다. 안도를 찻집을 중심으로 민예총 사람들이 작업하고 있는 ‘이응이야기’가 있다. 이들의 관심이 좀 더 확대되어 마을 전체에 벽화들이 더 많이 그려지면 골목 풍경이 한결 풍요로워질 듯하다. 통영 동피랑 마을이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사람들의 발길을 얻었듯이 점점 개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옛 골목이 지닌 따듯한 소통의 관계를 보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현대식 건물로 교체하는 개발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발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일종의 사회적 외톨이가 되어 버린 주민들과 시장 사람들은 서로를 보듬는 따스한 시선을 공유하며 삶의 터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오늘 내가 만난 시장 사람들은 한결같이 재개발이 되어 그만두게 되기 전에는, 사는 날까지는 여길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젊은 사진작가의 말처럼, 이들이 있어서 목척시장은 이어지고 있고, 이어갈 것이다. 
 
 안도르 찻집에 머문 잠깐 사이 시장 골목은 다시 캄캄해졌다. 어둠이 내리고 한 시간여 따듯한 불빛이 감돌던 시장 골목은 일곱 시 삼십 분 조금 넘은 시간, 모두 문을 닫았다. 가장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는 곳은 ‘통일세탁’집이다. 20년 전, 세탁소를 개업하려던 해에 북한 핵문제로 떠들썩했던 터라, ‘통일세탁’이라 간판을 달았다는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저녁이 되자 서늘한 기온이 감도는데도 정말 덥다고 손부채질을 하신다. 세탁소 일이 대부분 열기와 씨름하는 일 아닌가. 처마 아래 줄줄이 걸려 있는 세탁물을 거두어 내리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며 나도 반나절 시장여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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