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밥 기획 특집 2013.11.26 14:11

[대전 원도심 특별기획] 책은 낡았지만 사유의 정신은 푸르다 - 원동 헌책방거리

과거의 역사가 스며있는 책방

 

누군가의 손이 한번쯤 거친 책들이 모이는 곳, 바로 헌책방이다. 헌책방 개념으로 보면 책은 헌책과 새책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대전 원동에 모여있는 헌책방에는 손때 묻은 책들이 꽂혀 있거나 쌓여있다. 신중앙시장 주차타워 앞에는 명맥을 잇고 있는 헌책방들이 모여 있다. 오십년 가까이 서점을 하는 주인부터 2년 전 매물로 나온 책방을 인수한 사람까지, 책을 좋아하는 몇몇이 대전의 헌책방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970년대 중반, 대전에는 35개 가량의 헌책방이 있을 만큼 전성기였다. 중앙시장에 헌책방이 가장 많이 모여 있을 때는 12개까지 성업을 했다. 지금은 예닐곱 개에 불과하다. 정확한 수치를 말할 수 없는 것은 문을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하는 책방이 있기 때문이다.

원동 한복거리 옆에 자리한 헌책방을 찾은 때는 가을이 뒷모습을 보이고 있던 계절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거리에서 책을 정리하는 책방 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원동 사거리 큰 길 옆에 자리한 욱일서점에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두런 두런 얘기를 건네는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점 한켠에서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4 년 전, 욱일서점을 인수한 조방현씨는 사회과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주인이다. 책꽂이에 는 1980년대 대학생들이 즐겨보거나 숨어서 보던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강좌철학 · 해방전후사의 인식 · 세계철학사 ·인간의 역사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연구 ·한국사회의 재인식 · 통일전선과 민주혁명 · 한국노동운동론 등이 눈에 들어왔다.

1980년대 군부정권에 저항하던 수많은 청년들이 이런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다. 공식적으로 판매가 되는 책들도 있었지만, 판금조치가 이뤄져 일반서점에서 구하기 힘든 책들은 복사본을 통해 돌려 읽기도 했다. 쉽게 볼 수 없는 책을 본다는 점에서 긴장과 스릴의 책읽기를 즐겼던 시기가 1980년대다. 사회과학서적을 읽으며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은 486세대라 불리며 이 시대의 중심축이 되었다.

욱일서점 주인이 사회과학과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을 열자 주인이 작은 가방에서 책 몇 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쉽게 보기 힘든 책들이었다. 문교부 주최의 군사혁명예술축전에서 불린 교성곡 자료가 눈에 띠었다.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김동진이 작곡한 교성곡 “승리의 길” 악보였다. 악보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1961.6.19.라는 볼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마도 이날 교성곡이 불려졌던 모양이었다. 악보를 펼치니 “산 옆 외따른 골짝이에 혼자 누워 있는”으로 시작한 첫 구절이 음표와 함께 적혀 있었다.

욱일서점에서는 격변의 시기에 나온 자료들을 적잖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주인은 경복궁에서 열린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출품목록이라는 팜플릿도 소장하고 있었다. 행사가 열린 기간은 1962년 4월 20일부터 6월5일까지였다. 그리고 4.19 혁명 즈음에 만든 소식지도  흥미로웠다. 자료집의 맨 뒤에 쓰여있는 배부처가 어느 다방이라고 표기된 점이 이색적이었다. 아마도 공개적인 출판사에서 작업하기가 곤란해 다방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업을 한 것으로 짐작됐다.

이 집에서 발견한 책 중에 하나인 “미제침략사”.  이 책을 보고 있으니 오랫동안 시선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이 책은 대전 정동에 사무실을 둔 남녘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 중에 하나였다. 이 책을 펴낸 조성일씨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다. 대전에서 출판된 책이 필화사건에 연루돼 당시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조방현씨는 지금은 철거된 홍명상가에서 홍명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한 전력이 있다. 그러다보니 헌책방을 인수한 것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서점 안에는 과거의 역사와 갓 나온 요즘 책까지 혼재되어 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착각이 들었다.

 


헌책방의 산증인, 고려당

1980년대를 추억하며 길 모퉁이를 돌자, 사람 키보다 훨씬 높게 책을 쌓아놓은 고려당 책방을 만날 수 있었다. 올해 78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장세철 주인은 목소리가 또렷했다. 어느새 50년 가까이 헌책방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

 “56년인가로 기억하는데 원동시장에 이 건물이 생겼어. 처음엔 헌책방은 없었는데 60~70년대가 지나면서 거리 좌판 형식으로 헌책방들이 들어섰지. 그러다가 단속이 심해져 좌판을 못하게 되니까 하나 둘씩 건물 안으로 들어왔지”

“47년 정도 됐을걸요. 오래 다니던 단골들은 주로 대학 교수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들 정년퇴직 했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많이 다녔지. 근데 요즘은 도서관에 책이 많으니까 거기서 연구하는 교수들이 많지”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책방을 찾는 오랜 단골들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옛날의 단골들 중에는 장씨의 신세를 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연구를 하는 교수들에게 이곳은 보물창고와도 같았다. 주인이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것도 책방 운영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됐다.

“내가 고소설이나 가사에 관심이 많아. 그래서 미발표 소설들을 보게 되면 문헌을 고찰해서 교수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연락을 해서 가져가라 이랬지. 예전에 미발표 고소설인 <금송아지전>이라는 작품이 있었어. 그 이전에 학계에 발표된 적이 없어서 내가 충남대에 있는 사재동 교수한테 얘기해서 그 양반이 논문을 발표를 했지”

사재동 교수는 <불교계 국문소설의 연구>나 <불교계 국문소설의 형성과정 연구> 등의 책을 펴내면서 <금송아지전>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의 구비문학 가운데 <금송아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본처가 아들을 낳자 이를 시기한 첩이 몰래 아이를 암소에게 주어 먹게 하니, 이 암소가 금송아지를 낳았다. 이 금송아지가 서울로 가 정승의 사위가 된 뒤에 다시 사람이 돼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고려당 주인 장세철씨는 서지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고문헌이 들어올 때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가며 그 희소성의 가치를 찾아내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학계에 있는 연구자들이 이 서점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려당 서적 옆에는 박문서림의 간판이 붙어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얼마 전 문을 닫았다.

“박문서림이 우리집 보다 조금 더 오래된 서점인데, 지난 여름에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어. 이제는 서점을 안해”

옆에 있는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말을 할 때는 옛 친구를 잃은 것 같은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 넘게 헌책방을 함께 하던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홍희표 시인이 사랑한 청양서점

고려당에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면 고려당만큼이나 오래된 청양서점이 자리하고 있다. 비교적 깔끔하게 책들이 꽂혀 있는 서점에는 사십년 세월을 책과 함께 한 여주인이 지키고 있다. 남편은 주로 책을 거둬들이고 지금은 아들이 운영을 맡아하고 있다고 한다. 안주인 김은자씨의 나이는 예순다섯. 남편인 김진문씨가 청양이 고향이라 서점 이름도 청양서점이다. 목원대에서 시를 쓰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지금은 고인이 된 홍희표 교수가 고향 친구라 옛날에는 매일 오다시피했다고 한다. 홍 교수는 친구를 추억하며 청양서점이라는 시도 썼다.


고추 중에 매운 고추는
증말로 청양고추이지유

뒹구는 책 책들을 찾고 찾아
남아있는 자들의 영혼을 가꾸듯

한밭 중앙시장 안 청양서점
칠갑산 같은 김진문 동무 있지유

- 홍희표의 시 <청양서점> 전문-

 

홍희표 시인은 1967년 '현대문학'에 등단한 이래 수많은 시집을 펴냈으며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대전시 문화상' '시와 시학상 작품상' '한국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홍시인이 고향친구가 하는 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한 것은 물론이고 시장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고향시절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옛날에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예전 같지 않죠. 그리고 옛날에는 속에 낙서가 있어도 책을 주저 없이 샀는데 요즘 애들은  낙서 한 두 개 있어도 싫어해요. 또 새책을 사는 경향이 많지 않나 싶어요”

김은자씨는 수 십 년간 학생들을 접하면서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를 그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변화를 목격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옛날보다 애들이 순진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그래도 서점 안에 들어오면 순해지더라구요”

이 말을 들으니 책이 있는 공간은 학생들의 마음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폭력과 왕따 등 학생들의 갈등을 책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책과 관련한 명언이 셀 수 없이 많은 것도 책이 인생의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잠시 독서와 관련한 명언을 살펴보자.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 데카르트) “ 한 권의 좋은 책은 위대한 정신의 귀중한 활력소이고, 삶을 초월하여 보존하려고 방부 처리하여 둔 보물이다” (존 밀턴) “책은 한 권 한 권이 하나의 세계다”(윌리엄 워즈워스) “약간의 돈이 생길 때마다 나는 책을 산다. 그렇게 하고 남는 돈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산다”(에라스무스).

 책방의 안주인은 오랜 세월 책을 접하면서 책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경제관련 책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기억에 남는 책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일제 강점기 때 나온 책인데 일본말로 되었지만 우리생활상이 그림으로 나와있는 책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놔뒀으면 제 값 받을 수 있는데 싸게 팔았던 기억이 있어요.근데  우리가 천원 이천원에 팔았던 책들이 박물관에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좋더라구요”

“요즘은 고객들 연령이 높아지는 게 확연하게 알 수 있어요.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라 그런지아이들이 휴대폰만 열면 웬만한 건 다 나오잖아요.그런 반면에 옛날에 책을 많이 보신 분들은 헌책방 많이 와요. 책이 필요로 하는 분들이 주로 오죠”

스마트폰을 달고 사는 시대에 인터넷은 필수다. 정보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자책이나 웹북이 등장하는 시대에 헌책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아날로그 세대들에게 헌책방은 지혜를 찾는 보고임에는 분명하다.


시대를 따라가는 온라인 헌책방시대


헌책방 운영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이 중의 하나가 국민서적을 운영하는 이창수씨다. 그는 2년 전 이 가게를 인수했다. 책방 앞에는 책과 함께 골동품들이 놓여있었다. 오래된 시계를 비롯해 자잘한 옛소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경영적인 이유로 골동품을 같이하죠. 책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근데 지금이 불경기라 그런지 골동품 거래도 끊겼어요. 경기가 안좋은데 누가 이런 걸 사겠어요. 관심있는 사람들도 당장 지갑을 닫죠”

국민서적의 이창수씨는 가게 앞 2층을 얻어 책을 쌓아놓는 창고로 활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인터넷 책 판매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시작단계이기는 하지만 인터넷홈쇼핑으로 책을 사는 시대에 헌책도 그 대열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층 공간을 들어서니 눈에 들어오는 책 중에 하나가 브리태니커 사전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지금까지 발행된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영어로 쓰인 백과사전이다. 위키백과 자료에 따르면 이 사전은 2012년 3월 15일 종이책 출판이 244년 만에 중단되었다. 브리태니커의 초판은 1768년 12월에 편집, 1771년 3권으로 완간했는데 총 2689쪽이었다. 브리태니커 사전은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 사전을 소장하고 싶은 이들도 많았지만 워낙 가격이 비싸 집안에 들여놓기는 여의치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브리태니커가 종이책 출판을 중단한 것은 하루 평균 870만회가 조회된다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시대는 브리태니커보다는 위키피디아를 원한다”는 말로 작금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200개 이상의 언어로 그것도 무료로 제공되는 백과사전 시대에 브리태니커의 설 자리는 아마도 우리의 헌책방과 그 초상이 닮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직 책을 더 채워넣어야 하는데. 이제 인터넷 판매 시작이니까 더 확충해야죠. 그리고 대전시에서도 헌책방을 살리기 위해 지원도 해주면 좋은데...”

온라인 시대에 걸맞게 헌책방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창수씨. 그는 시의 지원을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전통시장의 현대화 사업은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비 가림 시설을 하거나 주차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대전의 전통시장도 상당부분 리모델링을 했거나 진행 중에 있다. 더불어 전통시장에 문화예술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 곳도 있다. 그런 점에서 헌책방은 문화예술을 입히는 좋은 소재이자 그 자체가 소중한 자원임에는 틀림없다.

 

헌책을 찾는 이가 줄어들고 있다. 원동의 헌책방도 더 줄어들지 모른다. 나이 지긋한 주인의 뒤를 이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도 모른다. 세월을 비껴갈 수 없는 현실에서 대전의 헌책방은 그저 실낱같은 명맥만 이어갈 뿐이다. 하지만 오래된 종이책이 전하는 가치와 정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래된 사람들이 오래된 책을 찾는 곳, 헌책방의 낡아가는 책 냄새를 맡으면 내가 읽었던 과거가 시나브로 깨어난다.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인도했던 문장들도 앞 다투며 뛰쳐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헌책방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이끄는 현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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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2013.11.26 14:00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 - 대전창작센터

빈집을 채우고 살고 싶은 마음

 

 사람의 온기가 떠나버린 빈집,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건물,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오래된 창고…. 여전히 도시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흉물이 되어버린 곳들이다. 이런 공간들이 생명력을 얻고 다시 쓸모 있는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인 대전창작센터를 둘러보며 그 답을 얻었다. 시작은 ‘관심’이었다. 

      

“현재까지 도심 속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로서 대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잖아요. 이 공간을 정말 예쁘게 잘 꾸며서 대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재미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8년 정식으로 개관한 대전창작센터는 국내 최초로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만들어진 복합문화센터다. 이곳은 1958년 농산물 검사소 대전지소가 자리했던 관공서 건물로 1999년 ‘대전시 좋은 건축물 40선’에 선정됐고, 2004년 9월에는 등록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한국 근대건축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지역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1999년 (구)국립 농산물 품질관리원 충청지원이 이사를 간 후, 줄곧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던 빈 공간이기도 했다. 건물 주변은 언제나 한산했다. 지하상가 입구가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인적이 드물어 스산한 기운마저 느껴졌던 곳. 어쩌면 그렇게 오랫동안 도시의 흉물로 남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건물이 조금씩 사람의 온기를 머금기 시작한 것은 바로 2005년부터다.

 

이러한 변화는 대전시립미술관 김민기 학예연구사의 작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대전시립미술관은 병원 로비, 도서관, 지하상가, 대흥동 골목 등의 미술관 밖 공간을 활용한 <열린미술관> 전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전시 프로그램 기획에 몰두하고 있었던 김민기 학예연구사는 도심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대전창작센터 건물을 눈여겨보았고, 관리부처인 보훈청에 <열린미술관> 전시를 제안했다. 그 후 2년에 걸쳐 2회의 기획전시를 진행했고,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대전창작센터 개관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건물이 지어진 1958년 당시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작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현대의 미술전시 시스템을 어떻게 잘 연결해놓느냐가 관건이었는데, 문화재청 위원들에게 자문과 심의를 받아서 모든 작업을 진행했고 건물 외벽 색깔은 물론 구조 하나하나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과거는 복원하되 미래를 본다
대전시립미술관의 <열린미술관> 전시가 진행되면서 대전창작센터 건물의 관리부처가 보훈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됐다. 그리고 대전시는 문화재청과의 계약을 통해 대전시립미술관이 현재 대전창작센터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영구 활용할 수 있도록 일을 진행했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리모델링 당시 건물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낡은 지붕 기와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어와 건물 내부 곳곳의 시멘트가 떨어져나갔고, 외벽의 페인트칠도 벗겨진 부분이 많았다. 또한 건물 뒤편에는 설계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창고가 증축되어 있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었다. 먼저 빗물이 새는 지붕 보수를 위해 1958년에 만들어진 기와를 찾아 나섰다.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똑같은 기와를 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이 따랐다. 수소문 끝에 경상남도에서 건축 당시 쓰였던 기와를 찾아낸 것이다. 외벽의 페인트 역시 처음 색을 그대로 연출했다. 또한 1층에는 보존돼 있지만 2층에는 그 흔적만 남아있던 창문 설비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건물 내부의 천장, 계단 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부 전시장은 되도록 못질을 하지 않고 벽을 세워 만들었다. 대전창작센터가 아닌 근대건축 문화재로서의 가치 또한 함께 보존해나가기 위해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잃어버렸던 건물의 시간과 역사를 되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대안공간으로서 대전창작센터는 대전의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것, 신기한 것,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설치, 마술, 착시, 미디어를 활용한 기획 전시를 통해 사람들이 미술에 재미를 느끼고, 그런 미술이 사람들의 일상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유도했죠.”

2층 전시장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스크린이 덩그러니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호기심에 한 발짝 걸음을 옮기던 순간,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김민기 학예연구사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에 의해 움직이는 영상이다.

 

2013년 11월 17일까지 진행되는 <프로젝트리뷰 2013-공존> 전시 작품 중 하나로 미디어 아티스트 5명과 소설가 1명, 그리고 과학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 작업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티스트들의 예술적 감각과 반짝이는 아이디어, 첨단과학의 섬세함과 놀라움도 만날 수 있다. 실험적이지만 결코 어렵지 않은 작품들로 눈길을 끄는 전시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국유재산이기 때문에 대관 전시를 할 수 없는 대전창작센터에서는 일 년에 4회 정도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실험적이고 대중적인 요소들을 전시의 주요 테마로 삼는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에 활력을 주고 즐거움이 되는 전시를 통해, 거리 미술관의 높은 문턱을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게 낮추는 것이 목적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주변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주말이면 외지에서 찾아오는 관람객들도 점점 그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흔히 대전의 문화예술을 논할 때, 지역출신 작가들의 활동이 많지 않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활동하는 작가들의 수가 많지 않고, 문화예술 활동의 규모는 작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지역에 흡수되지 않고 대전만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대전창작센터는 개관 초기 ‘아티스트 스터디’라는 그룹을 운영했다. 젊은 작가들이 모여 서로의 작품에 대해 논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함께 공유하는 모임으로 100명에 가까운 젊은 작가들이 이 스터디에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대전창작센터는 ‘대전예술 114’라는 별칭을 얻었다. 안으로는 젊은 지역작가들의 소통 공간, 밖으로는 대전지역 작가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네트워크의 중심이 된 것이다.

대전은 한 때 문화예술의 불모지라 불리기도 했다. 젊은 작가들이 활동하기에는 너무나 좁은 동네였고,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해줄 만한 인적, 물적 기반도 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원도심 활성화를 시작으로 도시문화를 새롭게 만들고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동안 음지에서만 활동해왔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서서히 따뜻한 햇볕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 어떤 지역보다 뚜렷한 색을 지닌 문화예술도시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 대전. 그 출발선에서 대전창작센터는 대전 문화예술을 이끌어갈 구심점이 되기 위해 오늘도 한발 한발 조심스런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원도심은 창작센터 기억의 원형이다 / 창작센터의 주요 전시활동

대전창작센터가 대흥동과 원도심을 주제로 기획한 전시의 면면을 보면 대전창작센터가 지향하는 지점을 엿볼 수 있다.지리적으로도 원도심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전미술의 흐름을 놓치지 않겠다는 작은 의지의 표현이자 실천이다.

2010년 8월에 열린 <열린미술관 – 대전블스>전시가 그 시작이었다. 이 전시는 그동안 대흥동에 대해 재조명하지 못했던 시간, 장소성에 주목하고 대전미술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전시로 다양한 실험미술과 옛날 대흥동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신문스크랩, 전시오픈기념으로 촬영한 옛날사진을 등을 선보였다다. 뿐만아니라 대흥동의 오랜 시간과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작가와 화랑대표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옛날 대흥동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영상,  대전여상 학생들이 대흥동의 현재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들을 수집, 전시하여 대흥동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전시로 평가받았다.

 


대흥동예술가들1950~60년대  /2011-03-04 ~ 2011-04-17.
1950~60년대 대흥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 및 예술관련 자료들을 살펴봄으로써 지역미술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 미술자료의 가치 및 그것을 수집하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미술관 아카이브 구축 사업의 중요성을 제기하고자 개최한 전시였다. 또한 대전미술의 초석이었던 주요 작가의 작품 및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소장자를 찾아 자료의 기증 및 자료대여 등의 협조를 기대하는 것도 전시의 목적으로 삼았다.

대전미술아카이브 2012:1950~60년대 고교미술활동 부대행사/2012.05.25 ~ 2012.08.19
 이 전시는 대전미술의 생성과 발전, 그 흐름을 살펴보는 전시로 <대전미술 아카이브 2011:대흥동화가들>전과 연속성을 갖는 전시이다. 대전지역에 미술활동 기록이 나타난 것은 이동훈, 박성섭, 김기숙이 미술교사로 활동한 1940년대로, 그 이후 1970년대 대전에 미술대학이 설립되기까지 외부에서 미술교사로 유입된 미술인과 그들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은 중등학교 학생들의 움직임이 미술활동의 대부분이었다는 것에 전시의 초점을 맞추었다.
6. 25전쟁 이후 대전에는 재건의 움직임과 함께 초등학교가 급격히 늘어나고 중등학교는 중학교, 고등학교로 분리되며 미술교육이 미흡하나마 활발해지는 시기였다. 대전의 여건은 여전히 타 도시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지만 계속되는 중, 고등학교의 설립으로 미술교사의 유입이 늘어나게 되고, 이들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미술반 활동을 시작으로 미술활동인구의 저변을 넓혀 가게 된다. 대전에 미술대학이 설립된 것은 1970년 대전실업초급대학에서 생활미술과의 설립과 1973년 목원대학교와 숭전대학교에 미술학과 설립되기 전까지는 고교미술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대전미술에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활동은 단지 고교서클 활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현재 우리나라 화단에 중진작가들이 되었다는 것은 대전미술사를 기술할 때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대전에 최초의 연합서클은 1958년에 결성하여 전시를 개최했던 ‘루-불 미술동인’이다.
 이 전시는 그들의 활동 당시 제작되었던 작품 혹은 근접년도의 작품을 전시하여 1950~60년대의 작품양상을 살펴보고, 기록물들(리플렛, 사진, 서신, 카드 등)을 함께 전시해 그 시대의 여건과 활동들을 전하고자 했다.

 

 

프로젝트대전.2012 원도심 프로젝트 / 2012-09-19 ~ 2012-11-18
<원도심 프로젝트>는 다양한 조형예술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17인을 초대하여 대전 원도심 대흥동 일대에서 '지역재생' 프로젝트를 확장된 커뮤니티아트로서 실현하고자 했다.
'예술'은 '도시'를 재생하는 에너지로 사용되어 (원)주민의 사적인 삶과 공적(경제적)인 삶의 현장에 직접 투입된다. 이에 17인의 예술가들은 주민들의 현장에서 작업하며 그들의 참여를 유도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도시민의 시선과 초상 그리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위트와 심도 있게 그려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프로젝트는 각 장소에서 과거의 역사성과 현재의 장소성을 담아내고 나아가 미래의 경제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향후 다양한 문화프로젝트를 포함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발전시켜 대전의 생성과정과 도시개발에 따른 딜레마를 밝혀내는 기회로써 대전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대전미술의 새물결 대전미술아카이브 2013  / 2013-05-24 ~ 2013-08-25
대전미술은 도시형성기인 1920년대 학교가 세워지고 미술교사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1940년 이전까지는 뚜렷한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40년대 이후 도시가 발전하고 학교의 수도 늘어남에 따라 미술인구도 늘어나고, 개별적인 작품활동과 그룹전 등이 열리면서 미술문화가 활기를 띄게 된다. 그러나 중등학교를 미술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술기반은 자립성을 갖추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후 50년대와 60년대에 들어와서 미술활동은 눈에 띠게 증가하지만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선 여전이 외지(미술대학에 입학하기 위해)로 나가고 신인등용을 위한 변변한 미술대전도 개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미술전문 교육기관이 신설되고 국전성격과 같은 미술계의 신인 등용문인 ‘충청남도 미술대전’이 개최되면서 대전현대미술은 경쟁력과 자생력을 갖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 대전지역은 목원대와 숭전대(현 한남대)에 미술학과 신설이 되고 1971년에는 충남미술대전이 개최되면서 대전지역은 미술전문인을 배출하고 미술에 등용할 수 기회가 넓혀지게 된다. 이에 따라 미술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작품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화랑들이 잇따라 개관되고 미술 활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며 자생력을 확보한다.
이러한 점에서 대전현대미술의 자생력과 발전을 이룬 기점을 1970년대 초반으로 규정하고, 그 역할과 파생적 영향에 대한 고찰을 위하여 전시를 기획했다.

 

대전창작센터가 대흥동과 원도심활성화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리적으로 대흥동에 자리하고 있다는 특징도 있지만 창작센터가 바라보는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전미술의 흐름을 조명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는 가운데, 대전미술의 산실인 대흥동을 주목하고 더 나아가 잊혀지고 있는 원도심의 기억을 복원함으로써 대전미술과 원도심 문화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창작센터가 창작의 흔적을 찾아내는 동안 우리의 기억도 퍼즐처럼 맞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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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오독 2013.11.14 15:42

오늘의 글

  송인효에게 박수를

  정 덕 재 (시인 ·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책임작가)
 
 대학 수능시험이 끝났다. 시험을 치른 다음날 나는 인터넷을 뒤져 국어영역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이형기의 시 <낙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청준의 <소문의 벽 > 등이 문학 관련 문제의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비문학 지문은 과학  ·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되었다. 이번 국어영역에 나온 지문 가운데 눈에 들어온 내용의 일부를 옮겨보겠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를 펴내며 역사 연구의 기본 단위를 국가가 아닌 문명으로 설정했다. 그는 예를 들어 영국이 대륙과 떨어져 있을지라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 왔으므로, 영국의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서유럽 문명이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이 지문을 인용한 것은 수능을 치른 수험생들의 처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거대한 유럽문명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고딩들이 처한 상황도 거대한 경쟁체제의 잘못된 교육환경과 깊은 상관성을 갖는다. 오직 대학만을 향해 달려가는 고달픈 인생, 반에서 1등을 해도 흔히 말하는 유명대학에 들어가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그들은 경쟁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동안 10대의 풋풋함은 지쳐가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에 순응해갔다. 그 중에는 원하는 대학에 가는 고딩도 있겠지만 생각하지 않았던 대학이나 학과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또는 대학을 포기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고딩도 있다.

 

[송인효, 인상 형제, 왼쪽 기타치는 녀석이 인효다]

 


 내가 잘 아는 한 선배의 아들이 이번에 수능시험을 보았다. 그 녀석 이름은 송인효다. 인효는 홍성에 있는 풀무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여느 학생과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녀석이 수능을 치른 것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을 옥죄는 수능이 뭔지 궁금해서 치른 것이다. 녀석은 몇 개월 전에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에 1년 동안 친구들과 농사일을 하면서 노래를 열심히 만들다가 군대에 가겠다는 계획을 말했다. 시험을 치르기 1주일 전인 시월의 마지막 날 밤. 그 녀석은 촛불문화제의 초대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여느 수험생이라면 시험을 코앞에 두고 이렇게 간 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선배는 녀석이 대학을 가든 안가든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주겠다고 한다. 그 돈으로 떡을 사먹든 밥을 사먹든 알아서 쓰라고 말이다. 내가 짐작하기에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녀석 답게 악기점을 기웃거리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홀가분하게 배낭 하나 메고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 대학에 갈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녀석의 진지한 고민 속에서 나온 선택일 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고딩의 의지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다시 국어영역의 지문을 조금 더 인용해 보겠다. “성공적인 응전을 통해 나타난 문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문제, 즉 새로운 도전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토인비에 따르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창조적인 인물들이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수의 대중까지 힘을 결집해야 한다”

[인효 아버지, 송성영 작가] 

  
 앞서 소개한 송인효같은 고딩을 나는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인 인물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이 많아질 때 경쟁으로 치닫는 교육환경도 조금은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녀석의 선택이 후회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건, 어쩌면 세상을 익숙한 대로 이해하려는 어른들의 습관화된 인식일지 모른다.


 수능시험이 끝난 날, 2학년 고딩을 둔 아빠가 “넌 이제 1년 남았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뱉지는 않았는지, 1학년 고딩을 둔 부모가 “넌 이제 2년 남았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자.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 들어가는 건 고딩 스스로가 아니라, 등을 떠미는 어른들이다. 경쟁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동인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그 경쟁이 공정하지 않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불공정한 경쟁에서 배우는 건 남을 생각하는 배려와 나눔이 아니라 배제하고 독식하려는 태도이다. 

  수능 국어영역 문학 지문으로 출제된 이형기의 시 <낙화>의 한 구절을 적는 것으로 나는 송인효라는 한 고딩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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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밥 기획 특집 2013.11.12 13:17

[대전 원도심 기획 특집] 대전의 낭만거처, 산호여인숙

 

대전의 낭만거처, 산호여인숙

 

산호여인숙은 잠만 자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다.

 


 그럼 뭐지?

 산호여인숙에 가기 전 잠깐 들린 계룡문고에는 뜻밖에 ‘산호여인숙이 추천하는 책들’이라는 부스가 있었다. 아기자기한 부스 역시 딱 산호여인숙 분위기였다. 어떤 사연인지 공동대표로 산호여인숙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서은덕 씨에게 물었다.
 “계룡문고의 기획이지요. 그 부스는 지역사회의 소통이란 주제로 한 달에 한 번 씩 한 단체나 모임이 서점 한편에 부스를 만들어 단체가 추천하는 도서를 소개하고 그 단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함께 담는 코너에요. 그리고 판매금액의 10%를 계룡문고 상품권으로 돌려줍니다. 지금은 산호여인숙이 권하는 책과 산호여인숙과 인연이 닿은 분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이요. 지역사회와 상생하자는 취지이죠.”

 산호여인숙의 공식적인 주소는 대전 중구 대흥동 491-5번지이다. 계룡문고 건너편으로 대흥동에 들어서 오른쪽으로 만나는 작은 골목 안쪽에서는 아담한 산호여인숙을 만날 수 있다. 산호여인숙은 정말 여인숙이다. 사람들이 와서 고된 몸을 쉬고 가는 곳이기에 여인숙이기는 하지만 또 그냥 그렇게 단순한 여인숙은 아니다.
 요새 말로는 게스트하우스라고 부르는 성격으로 여행자들이 숙박을 하지만 또 그것이 다가 아니다. 어렵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생적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문화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산호여인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전의 원도심 중 하나인 대흥동에서 매년 열리는 ‘대흥동립만세’라는 축제를 알아야 한다. 이 축제는 대흥동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과 상가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축제이다. 이 축제로 대흥동은 8월 동안 많이 들떠있다.
 “대부분의 축제가 위에서 주도해서 만들어지는 형태인데, 우리 축제는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끼리 만드는 거예요. 대흥동에 있는 몇몇 개인들이 술을 마시다 축제를 해보자는 취지에 동의했어요. 장소도 우리가 정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는 하고 할 수 없는 건 하지 말자 이런 합의였죠.”

 ‘대흥동립만세’에서 태어나다

 그렇게 2008년 첫 축제를 열면서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게 대흥동의 문턱이 낮아지자 다시 젊은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인디밴드, 연극인들을 비롯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흥동에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자원봉사 하는 친구들도 일이 아닌 즐겁게 노는 것을 목적으로 모여 신나게 놀고 함께 기획했다.
 이렇듯 ‘대흥동립만세’는 어떤 실체를 가진 단체가 아니라 대흥동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만든 그저 개인의 연대라고 했다. 그것도 각각 강한 색깔을 가진 개인이 만든 느슨한 연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할 땐 반짝 모여 즐겁게 한다. 누군가 기간을 정하고 카페에 자기 마음대로 홍보하면 그게 끝이다. 그러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다가 짠하고 모여 즐겁게 일을 만들고 한바탕 논다는 것이다. ‘대흥동립만세’를 계기로 다양한 예술인들이 서로에게 애정이 만들기 시작한 것이 산호여인숙의 출발이다.
 
 축제에 참여하며 교류했던 문화예술인들이 게스트하우스, 그러니까 그들이 함께할 거점 공간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있었다. 그것 또한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왔으며, 자연스레 장소를 물색하다가 지금의 공간을 발견했다고 한다.

 산호여인숙 건물은 1977년에 지어지고 1990년대 말까지 여인숙으로 운영되다가 폐업하고 10년간 휴업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2011년 4월 어느 봄날, ‘대흥동립만세’가 주체가 되어 건물의 임대계약을 하고 만다. 또 즐거운 일이 저질러진 것이다.
 ‘대흥동립만세’에 출몰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연극인, 음악인, 건축인, 장사하는 예술인, 출판인 등 대흥동을 기반으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산호여인숙을 잉태하고 함께 출산한다. 어떤 연극인은 임대료을 대고 건축 하시는 분이 내부공사로 참여하고 각자 나름의 품을 팔아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놀이터를 완성해 나간다.

 자산은 사람입니다

 산호여인숙의 외관은 오래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도배와 장판이 깔면서 점점 다른 공간으로 모습을 갖추어 간다. 생활정보지에 광고도 냈다. 버릴 물건이 있으면 달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시민들이 소파, 식기세척기, 밥그릇, 숟가락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또 많은 집기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주워와 리폼한 것이다.
 이렇게 4개월간의 준비 끝에 2011년 8월 ‘대흥동립만세’ 축제에 맞춰 산호여인숙은 게스트 하우스 겸 복합문화공간으로 문을 연다.
 “우리의 자산은 사람입니다. 산호여인숙은 숟가락을 후원해주신 사람에서부터 매일 출근해 이것저것 다듬어 만든 사람들 모두가 모여 만든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입니다. 정형화된 인테리어가 아닌 개성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야기가 숨어있기 때문이죠.”

 산호여인숙의 공동대표로 여러 잡일을 하고 있는 서은덕 씨는 여러 사회단체에서 일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자발적인 형태의 마을 축제를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대흥동립만세’와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마을 공동체이면서 억지스럽지 않고, 예술적이면서 자유로운 산호여인숙은 현재 본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익숙한 도시공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재창조하고 싶었죠.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런 노력이 이 공간을 게스트하우스 이상의 문화공간으로 바꾸었습니다. 작은 전시회를 열거나 베란다에서 영화제를 열거나 공동체 화폐 ‘두루’를 사용하는 짜투리시장을 열거나 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쓰임새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기획이 즐거워요.”

 

 

 산호여인숙의 역할은 뭘까?

 기본적으로 산호여인숙은 게스트하우스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흥동을 안내하며 아카이브하는 공간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흥동을 중심으로 원도심을 안내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작게는 맛집 소개부터 크게는 원도심 전체 투어를 진행하기도 한다. 대전 원도심은 근대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 많고 문화예술의 근원지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외부인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시간과 자본에 의해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대흥동 트러스트를 소소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대흥동에서 발생되는 문화예술 팸플릿, 포스터 등을 모으고 보관하는 자투리도서관이 한 귀퉁이에 자라잡고 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역할도 중요하다. 1층은 젊은 예술인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공간이자 다양한 문화예술이 숨 쉬는 창작공간이다. 작가들이 작업을 하고, 전시하고, 그들의 물건을 파는 자투리시장을 열기도 한다. 또 공연을 하고 복도에서 강의도 한다. 영화를 찍는 사람도 있으며 이들이 즐겁게 부대끼기 때문에 장르 간 크로스오버가 일어난다. 이렇게 1층 5개의 공간에는 문이 없이 항상 열려있으며 작품은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다. 그리고 작가들은 오가는 어떤 이들과도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
 2011년에 열린 ‘게스트&게스트’, ‘빈집여행프로젝트1+1’, ‘산호여인숙 기획전시 여관’, ‘산호여인숙을 점령하라!’ 등이 이런 복합장르와 탈장르를 추구하는 움직임으로 열린 기획들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아주 재미있고 또 놀랍다.

 2층은 게스트하우스이다. 9개 방으로 최대 25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사실 두 명이 발을 뻗으면 닿는 예전의 여인숙 그대로이다. 방 이름도 재미있다. 한 지인이 에어컨을 기증하였다하여 그 방은 ‘키다리 아저씨방’이다. 또 4명이 들어가는 ‘친목을 위한 고스톱방’, 벽지가 모자라 남은 벽지를 모아 붙인 ‘혼돈의 방’ 등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방들이 모여 있다. 

 

 


 또 2층의 방 중 두개의 방은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곳으로 장기 ‘산호주민’이 거주하는 곳이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거주와 창작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산호가 운영하는 창작 레지던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집요? 비공개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이 모이죠. 만화가, 미술 하는 친구, 연극하는 친구들, 중국 작가들, 다양한 사람들이 다녀갔어요.”

 이뿐 아니다. 산호여인숙에서는 대흥동의 젊은 기획자들이 모여 일주일에 한번 씩 ‘오감’이란 모임을 연다. 또 대전의 근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포럼과 대전을 연구하는 학예사 모임이 열리는 곳도 산호여인숙이다. 이렇듯 산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문화를 즐긴다.
 “우리가 자유로운 공간이긴 하지만 작은 공간입니다. 다양성 중에서도 작은 다양성이죠. 실제로 공간이 좁으니까 열 명 정도만 모여도 굉장히 북적북적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내용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끼리 작은 규모로 기획의 완성도도 높이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재미없으면 안 하죠. 이것이 우리들 나름의 기준입니다.”

 

작은 돌멩이 아래 꾸물대는 마법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작게 뭔가를 벌이는 공간인 산호여인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서은덕 씨의 말을 빌어보면 뭔가 잡히는 것이 있다.
 “어릴 적, 냇가에서 돌멩이 들어보면 그 아래 아주 작은 공간에 벌레들이 바글바글하던 모습이 자주 떠올라요. 여긴 바로 그런 공간일 것 같아요. 사회에 나가기 전, 자기를 실험하면서 자기를 파악하고 잠재력도 짐작해보는, 또 공동작업도 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의 특징을 눈치 채는, 또 먼저 사회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싶은 친구를 찾아내는, 그런 연결고리가 되는 문화적 중간지대랄까요?”

 문화적 활동만으로 산호여인숙을 운영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세속적 물음도 빠뜨릴 수 없었다.
 “주로 게스트의 수입으로 운영되죠. 크지 않은 돈이지만 적정하게 운영하고 있어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업처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구조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 문화적 환경은 사업의 성격에 따라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적지 않다. 사회적 기업이나 마을기업을 만드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면 좀 더 많은 지원을 받아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산호여인숙의 원초적 기획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하기 위해서는 지원 사업에 크게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산호여인숙에 어울리는 작은 프로젝트는 일부 지원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자유롭게 산호의 목소리를 내고 산호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산호가 추구하는 바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의 자식들이라고 불러요. 스스로 만들어지는 마법을 믿는 거죠. 돈 안 벌고 돈 없어도 먹고 산다는 믿음? 산호여인숙의 생명력은 호혜죠. 나눔의 삶 말입니다. 돈은 없는데 항상 풍족해요. 신기하죠? 마르지 않는 샘 같아요.”
 그래서 산호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때그때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다. 모두가 스쳐지나가는 인연인데 뭔가를 함께 하고나면 끈끈한 인연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서 쉬고 싶어 하고 그것이 인연으로, 친구로 남는 과정이 바로 산호여인숙이다.

 

산호여인숙 바로 보기

 마을기업인 ‘원도심 렛츠’와 함께 시작한 기획이 짜투리시장이다. 엄마, 이모 같이 푸근한 마을기업 사람들과 함께 시작한 짜투리시장은 한 달에 한번 토요일에 산호여인숙 앞 골목에서 열린다. 대안화폐인 ‘두루’만이 사용되는 이 시장은 밥할 사람은 밥하고 팔 사람은 팔고 놀 사람은 노는 말 그대로 동네잔치이다. 자연스레 마을 아줌마들과 예술 하는 젊은이들, 대흥동 사람들이 함께 모인다. 또 언론에 알려지면서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도 같이 어울리기도 한다.

 “여관하고 여인숙의 차이를 아세요?”
 각 방에 화장실이 있으면 여관이고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면 여인숙이라는 사실을 서은덕 씨도 잘 몰랐다. 술에 취해 예전의 여인숙을 생각하고 들어왔던 한 중년의 남성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서 우연찮게 산호여인숙의 역사도 들었다는 것이다.
 “한 책자에 우리 산호가 소개되었어요. 그래서 이 지역보다 외부에서 더 많이 찾아오고 문의가 옵니다. 물론 좋은 점도 많지만 불편한 점도 많아요. 미디어를 통해 알려질 때면 어느 정도 포장되어 나가기 때문에 정작 그 이미지만 보고 오셨다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보시다시피 작은 여인숙이잖아요? 그럴 때 불편하죠.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여지길 원해요. 그리고 거기에 매력을 느끼신 분들만 찾아오셨으면 좋겠어요. 더욱 우리는 구경거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생각했으면 좋겠고요.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문화가 필요하죠.”

 산호여인숙이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나갈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산호에게는 억지로 만들어나가는 미래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산호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밖에는 없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숙박업에 대한 부담도 조금 있어요. 그러나 그것보다는 산호여인숙의 생명이 다하면 끝나지 않겠어요? 억지로 끝까지 잡지는 않을 겁니다. 대신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해보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거죠. 우리도 지금처럼 될지 몰랐어요. 억지로 하자고 됐겠어요? 흐름대로 가야죠.”

 


 사회에는 보편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보편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수직적인 구조가 아닌 수평적인 연대가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는 시간이 올지 알 수 없지만, 이런 가치가 보편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산호여인숙과 같이 다양성으로 모이고 서로를 배려하는 가치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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