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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밥 기획 특집

[대전 원도심 특별기획] 참으로 고운 종소리 - 대흥동성당

우여곡절을 겪은 성당건축

 

 천주교 대전교구의 설정은 1958년이다. 대전교구의 설립과 함께 대흥동 본당은 주교좌 본당으로 그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역할이 많아지면서 성당 건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원 라리보 주교의 사제수품 53주년이 되는 1960년 3월10일에 마침내 대흥동 성당의 기공식을 가졌다. 예나 지금이나 큰 건축물을 짓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다반사다. 특히 1960년에는 사회가 불안정하였고 신자들의 생활도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당을 완공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60년 여름에 기초공사는 마무리됐지만 시공을 담당한 회사들의 갈등으로 지연되다가 1962년 3월에 공사가 재개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대흥동 성당은 같은 해 9월8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12월 31일 준공되었다. 당시 들어간 총공사비는 1억4천만환이다. 건축 당시 성당 건축물은 규모나 양식면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성당 건축물이 고딕 양식의 적벽돌 건물이 많았던 것과는 다르게 이 성당은 시멘트 벽돌을 사용해 마감을 했다.
큰 성당을 내부에 기둥 하나 없이 건축한 것도 높게 평가를 받았다. 성당설계는 이창근이 했고, 설계도는 로마 교황청까지 보냈다. 성당을 지을 당시 찾아온 노기남 대주교와 오기선 신부와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 오 신부, 이건 얼마나 크게 짓고 있는건가?
 “ 아주 조그만해 보이십니까”
 “ 글쎄, 교우 몇 명이나 앉을까 모르겠네”
“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명동 대성당보다 백평이 더 큽니다. 그만하면 교우 몇은 앉을수 있지 않을까요 허허허”
 “ 예끼 이사람,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나? 명동 대성당보다 크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오신부는 실제로 기술자를 명동성당에 보내 실측을 해봤다고 한다. 그 결과 대흥동 본당이 큰 것으로 파악이 됐으나, 실제로는 명동성당이 90평 가량 더 크다고 한다. 이런 해프닝이 있잇던 것은 명동성당과 비견될 만큼 규모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성당을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오신부는 건축하는 과정에서 대전 신사에서 사용하였던 화강암을 자져다가 성당 창 아래를 두르고, 영세대와 성수대는 신사 제단에 쓰던 것을 가지고 와서 변형해 사용했다. 이는 로마시대 박해가 끝난 후 판테온 신전을 성당으로 변형시켜 사용한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젊은 작가들, 성당에 예술을 입히다

 

성당의 규모도 관심을 모았지만 대흥동 성당의 외벽에는 열두 사도의 부조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여섯사도는 이남규 교수의 작품이다. 나머지 여섯 작품은 최종태 교수의 작품이다. 최종태 교수와 이남규 교수는 중학교 미술반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였다. 두 사람은 대학교까지 1년 선후배사이로 인연을 이어갔으며 두명 다 대흥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주임신부였던 오기선 신부가 두 명의 무명작가에서 작품을 의뢰한 것은 상당한 파격이었다. 두 젊은 작가들은 필요한 재료비만 받고 긴 작업을 이어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종태 교수의 생전의 회고를 잠시 살펴보자

 “저는 천안고등학교에서 작업을 했지만. 따로 작업공간이 없던 이남규 교수는 여름방학 때 대전공고에서 교실 하나를 빌려 작업을 했어요. 작업을 하는 동안 오 신부님은 거의 매일 작업 현장에 오셔서 책을 읽으면서 우리 곁은 지켜주곤 했어요. 그리고 작업이 끝나면 늘 우리를 데리고 가서 불고기에 소주를 사 주시곤 했어요. 당시로서는 불고기가 아주 귀하고 비싼 음식이었거든요” (대흥동 본당 85년사 인용)
 
 젊은 작가에 기대와 지원은 최종태 교수의 작품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최교수가 성모상을 제작하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는데, 성모 마리아에게 치마 저고리를 입힌 것이다. 이처럼 낯선 성모상은 신자들의 구설수에 오르고 반대도 많았지만, 오신부는 2미터가 넘는 이 성모상을 성전 제대 오른쪽에 세우고 왼쪽에는 소화 테레사 성녀상을 세웠다. 마찬가지로 2미터가 넘는 성 요셉상은 제단 정면 벽 상단에 세워졌다.
최종태 교수의 작품은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당시 관리개념이 희박했던 시기에 발생한 안타까운 일이다. 고인이 생전에 했던 회고담을 살펴보자

 “ 언젠가 대흥동 성당 내벽에 그려진 부 신부님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갔더니 성모상과 성 요셉상이 둘다 보이지 않는 거예요. 물론 행방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요. 사실 그 작품들은 제 초창기 작품이라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최초의 한국적인 성모상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거든요.”

자신의 작품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작가의 실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우리 미술사에서도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45년 세월을 지킨 종지기

 

대흥동성당을 성당답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종소리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정오와 저녁 7시에 대흥동 일대에는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대흥동 성당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종은 대흥동 성당을 상징하는 소리가 됐다. 경박스럽지 않고 요란하지도 않다. 잠시 방황하는 영혼을 적시는 종소리를 소재로 쓴 이해인 수녀의 시를 음미해보자

 

 

종소리 

 

항상 들어도

항상 새로운

당신의 첫 소리

방황하며

지친 내 영혼

울다 울다 쓰러져

다시 들으며

나를 찾네

 

 

멀리 있고

높이 있어도

늘 가깝고

귀에 익은

그리움의 힘이여

죽어도 잊을 수 없고

절망 속에도

쉽게 떠날 수 없는

처음의 사랑이여

 

 

울다 쓰러진 지친 영혼을 달래는 종소리는 수도자에게만 의미 있게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대흥동 거리를 걷는 이들 또한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곤 했을 것이다. 맑은 종소리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은 올해 예순일곱의 조정형씨. 성당에서는 세례명인 방지거 아저씨라고 부른다.

방지거 아저씨가 대흥동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9년부터다. 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은 방지거 아저씨는 아는 신자의 소개로 대흥동 본당 관리직으로 들어왔다. 청소를 하고 본당을 찾는 차량관리를 하고 규모가 큰 성당의 이곳 저곳을 손보는게  그의 주된 업무다. 종지기가 된 것도 그때 부터다. 처음에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씩 종을 쳤지만 아침시간에는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와 점심과 저녁 2번만 치게 됐다. 45년 동안 종을 쳤으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이다.

 

 몇 년 전 중년의 여성이 성당을 찾았다. 대흥동 성당을 다니는 신자는 아니었다.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성당입구에서 종을 치는 사람을 찾았다. 방지거 아저씨는 그 여성이 낯설었다.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아저씨, 저는 오래 전에 대전여중을 졸업한 학생인데요. 문득 이 곳 앞을 지나다 보니까 종소리가 생각나서 들어왔어요. 저 학교 다닐 때 3년 동안 들었던 종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웠는데요. 그 종소리를 만들어준 분에게 감사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대흥동성당 바로 옆에 대전여중이 자리하고 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적어도 점심시간 만큼은 그 종소리를 들었다. 어린 여학생에게 그 종소리가 오랫동안 각인된 모양이었다.

또 한 번은 성당 인근에 사는 외국인 한분이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성당관계자에게 외국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제가 며칠째 종소리를 듣고 있는데요. 지난주 치던 종소리랑 느낌이 다르던데 종에 무슨 문제가 생긴건가요?”

이 전화는 성당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 것은 종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종지기인 방지거 아저씨가 종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방지거 아저씨는 로마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떠났기 때문에 타종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던 것이다. 숙련되지 않은 솜씨로 종을 친 것을 이 외국인이 알아차린 것이었다.

대흥동 성당 종 축성식이 거행된 것은 1963년 3월 10일. 크기가 다른 세계의 종은 모두 프랑스에서 주문한 것인데, 당시 본당 신자인 유도순(루가) 김학분(테레사) 부부가 기증하였다. 예배당 2층부터 시작되는 백개 가까운 계단을 오르면 성당 꼭대기에 종이 있다. 이 종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데 간결하고 웅장하고 깊이있는 소리를 낸다.

방지거 아저씨는 주교님이 선물한 시계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종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종줄에 매달리듯 당긴다. 그가 주교님에게 처음에 받은 시계는 세이코. 그 다음은 오메가 시계였다고 기억한다, 한동안은 시계를 보고 종을 쳤지만 세월의 흐름 탓에 시계가 고장났고, 그 다음부터는 평화방송의 시보에 맞춰 종을 치고 있다. 그는 성당의 관사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1969년부터 사택에서 지내고 있으니 그 세월도 엄청나다. 종소리를 쌓을 수 만 있다면 그 높이는 가늠하기 없을 정도로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의 자랑보다는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돌아보기를 바라고 있다.

 
“내 종소리를 들으면서 잘못을 회개하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면 종을 치는 일도 복음이 되지 않을까요”

방지거 아저씨에게 자신이 치는 종소리를 듣고 해줬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종소리가 참 곱네요, 이 말이 가장 듣기가 좋아요”

곱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상황이나 물질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녔지만 최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 (무엇의 모양이나 빛깔이) 보기 좋게 산뜻하고 아름답다.
 · (마음씨나 말씨가) 상냥하고 순하다.
 · (물체의 표면이나 결이) 거칠지 않고 매끄럽다.
 · (소리가) 듣기에 거친 데가 없이 맑고 부드럽다.
 · (무엇이) 마음에 기껍고 탐탁하여 사랑스럽다.
 · (가루가) 아주 잘아서 만졌을 때 느낌이 보드랍다.
 · (피륙이)올이 가늘고 촘촘하여 섬세하다.

그는 명동성당의 종소리도 들어보았다. 꿈에 그리던 노트르담 성당의 종도 쳐봤다. 하지만 방지거 아저씨는 대흥동 성당의 종소리만큼 곱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듣기에 거친 데가 없이 맑고 부드럽다는 뜻의 곱다, 아마도 마음의 결이 거칠지 않고 매끄럽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해외순례를 나가거나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항상 종을 쳐온 종지기 인생.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종탑을 계속 오른다.

“ 마음이 괴로울 때 종을 치고 나면 한결 나아져요. 걸을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마지막까지 이 종탑에 오를 겁니다”

 

 


관계를 깨닫게 하는 알람

 

대흥동성당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두 차례 어김없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종교와 무관하게 종소리를 인식하는 태도는 각기 다를 것이다. 12시 점심시간에 종소리가 울리면 대흥동 직장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 벌써 점심시간이네, 오늘은 뭘 먹지, 사리원면옥에 가서 냉면 먹을까”
“ 수라면옥에서 갈비탕 먹으면 어때요?”
“ 아, 오랜만에 스마일칼국수에 가서 국수랑 김밥 먹으면 어때?”
“ 태화장 자장면은 어떤가?”
“ 과장님, 돌아오는 길에 후식으로 성심당 튀김소보로는 어떤가요”

생각만 해도 입맛을 돋우게 하는 식당들은 대흥동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난 뒤 저녁 7시에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늘 저녁 진로집에서 소주 한 잔 어때?”
“두부두루치기 좋죠”
“소주 말고 내집에서 막걸리 한잔 먹으면 어때요”
“그럼 소주 한잔 하고 난 뒤 설탕수박에서 맥주로 입가심하자구”

하루 두 번의 종소리가 사람들을 이어주는 곳, 성당의 종소리가 있어 대흥동 거리는 낭만과 추억이 쌓여간다. 종소리의 여운이 가시면 대흥동에는 젊은 연인과 중년의 직장인들이 밤거리를 걷는다.